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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예술가로 살기의 윤리학, 혹은 임노동 하기의 미학 정은영 (작가) 이 글은 청탁에 의해 가능해 졌지만 순전히 나 개인의 예술가로 살기와 임노동 하기의 어떤 가치에 대해 구술하고 변명하기 위해 쓰여졌다. <컨템포러리아트저널>은 이 원고를 청탁하면서 경험을 드러내는 방식의 글쓰기를 권유했는데, 안타깝게도 최근의 나는 소위 ‘경험적 글쓰기’라 할만한 것을 거의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선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소중한 경험주의적 인과론을 거의 병신력에 가깝게 만들어버린 그 분의 영향이 지대했슴을 부인하긴 힘들 것이고, 더불어 이 ‘경험론’이 행위의 주체로서의 저자의 권위를 무소불위의 것으로 거듭 강화 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혐의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 한때 중대한 인식론적 단절을 가져왔던 경험적 글쓰기가, 이제 독자를 침묵하게 할 뿐, 저자를 더 성찰하게 하지 못한다면, 굳이 사적 경험과 내밀한 역사를 공적인 장으로 가져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목소리가 있을 때, 이를테면 ‘예술가의 삶’과 같은 언뜻 ‘특수한’ 양태로 분류되는 몇몇 삶들에 부여된 신화와 특권의식을 벗겨내고자 할때, 어떤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을 취해야 할지 참으로 곤궁해진다. 그런 연고로 또 다시 경험을 되짚고, 사적 역사를 더듬는 구태의연한 밤이다. 대학에 입학한 1993년 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유학을 위해 서울을 떠났던 약 2년의 시간과 자발적으로 4대보험이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새롭게 일을 찾기 까지의 6개월간을 제외하고는 한시도 임노동(그것이 파트타임의 형태였건 풀타임의 형태였건)을 쉰적이 없다. 노동 이외의 시간은 이미 고정되어 있는 노동시간에 맞추어 짜여지고, 작업하기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벗어났다. 어찌 보면 투잡족으로 살았던 것이지만, 달리 보면 일요 화가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고, 어떻게 보면 개미와 베짱이가 사이좋게 한 몸을 이룬 것이기도 했다. 먹고사니즘의 실천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늘 임노동을 하지 않는 것에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 스스로 ‘예술가’라는 특권적 존재가 아닌 사회공동체의 일원이기 위한 헌신과 기여는 임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몸을 놀린 만큼의 임금을 받고, 최저임금이 얼마인지에 대해 민감하게 각을 세우고,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이 얼만큼의 자본으로 환산가능한 가치인지를 소위 ‘사회적 시세’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고용하고 조직하고 운영해야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누구보다도 임노동의 현장을 경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시장에서 작업을 매매하는 방식으로는 전혀 돈을 벌지 못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라고 누군가 탓한다면 달리 반박할 길은 없다. 그러나 부쩍 다양해진 문화예술기금/창작지원금을 제공받아 작업하는 것이 비 상업적 작가라 낙인된 예술가 동료들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 되었음에도, 나는 어쩐지 기금신청서를 노려보다가는 번번히 보이콧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창작 지원금이라는 ‘공적기금’으로 작업을 제작하는 것은 그것으로 사회공동체에 예술적인 가치와 인프라를 돌려놓겠다는 의미인 것인데,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예술적 창작물들이 ‘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견지에서 최근 문화 작업자들에게 열렬히 환영받고 있는 ‘텀블벅’과 같은 후원싸이트를 통해 후원자를 모집하고 그 후원금으로 창작물을 내는 방식 또한 내게는 여전히 판단유예로 남겨져 있다. 이 ‘후원’이라는 방식은 ‘공공 기금’을 쓰는 것보다도 훨씬 부담스럽고 문제적인 자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른 영역에서의 노동을 통한 돈벌기는 나에게는 비교적 자본을 ‘정직하게’ 획득하고 유용할 수 있도록 안도감을 준다. 그것은 동시에 “작업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번다”가 아닌 임노동 그 자체로 매우 독립적인 영역을 지키면서 그 자체의 성취감을 만들어 낸다. 예술가로 살아가고 버티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임노동자로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임노동자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번번히 몰아치는 피로와 싸워야하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매 순간 뒷 순위로 밀려나는 작업시간의 확보에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기분이 지속된다. 이런 정도의 고통은 스스로 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예고된 것이었지만 언제나 이를 악물고 조바심을 치게 된다. 가끔은 너무 우울해서 삶에 대한 아무런 의지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견지하고 있는 노동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물론 최초의 생각과 비교하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임노동이 자본과 노동력의 교환이며 이 과정에서 자본가의 노동자에의 착취가 일어남을 분석했던 맑스를 거스르기 위함이 아니고, 국민을 산업역군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토건국가의 근대화 기획에 동의하기 위한 것도, 일을 통한 자아/꿈의 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부상시킨 신자유주의의 환각화된 노동미학에 힘을 싣기 위함도 아니었다. 나아가 노동자의 권리와 권익 위에서 안온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동시대 ‘노동할 권리’에 기반한 삶의 진정성을 의심치 않았던 무수히 많은 임노동자들의 존재가 거부되고 박탈되는 참담함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2005년 조각가 구본주의 사고사는 ‘예술 노동자’라는 노동권에 기반한 예술가의 존재를 부각시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에 관한 보험사의 착취에 가까운 배상입장으로 인해, 그는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이 예술가의 죽음의 몫에 가격을 매기는 기준과 그 과정의 폭력 안에서 갑자기 ‘존재론적’ 노동자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예술가의 예술활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노동하는 존재’, 즉 노동권에 근거한 ‘보통의 시민’존재로 정체화, 혹은 정치화 하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예술 ‘노동자’라 호명하면서 미묘하게 불편해진 지점은, 예술가의 노동행위의 가치가 당시 삼성화재가 밝힌 ‘도시노임노동자’의 노동가치보다 ‘우월한’ 것임을 주장하고 나온 것에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가’를 여타 비예술가 노동자와 분리하면서 신화화하고 특권화했던 역사의 판박이처럼 보였다. 예술가가 이제야 비로소 스스로를 ‘노동자’라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인간의 존재 범주안에 관계시켰음에도, 마치, 어떤 우월한 가치를 자신들이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인정 투쟁으로서의 ‘노동자’되기는 반성과 한계를 뒤로하고 껍질뿐인 예술노동자들을 수천 수만 양산한 채 잊혀져 갔다. 이른바 최고은 사건이라 불리는 한 젊은 시나리오작가의 죽음은 다시 한번 예술가들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구본주의 죽음이 거대자본의 횡포앞에서 무력해진 입장들만 남긴채 잊혀졌다면, 최고은의 죽음은 보다 실질적으로 예술가들의 고용환경에 대한 논쟁을 부상시켰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현대적 시민국가에서 한 예술인이 ‘아사’ 했다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예술계 밖의 더 많은 사람들 또한 동요했다. 정치권이 움직이자 법안이 발의되고, 지난 11월 17일 ‘예술인 복지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술활동이 즉 노동활동인, ‘예술 노동자’의 지위향상과 복지증진을 꾀한다는 이 법안은 예술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가. 예술인의 정의(안 제2조) 예술인을 「문화예술진흥법」 제2조제1항제1호에 따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창작, 실연,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로 정의함. 예술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라는 정의는 예상대로 수많은 예술가들을 실망시켰다. 예술가들은 이번에는 보험회사가 아닌 국가에 그들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즉 정식고용 이후에 얻을 수 있는 몇 장의 문서화된 증명서들을 발부 받을 수 있어야만, 노동의 권리를 부여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노동화된 존재를 넘어서 문서화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이 노동이 되는 것은 ‘정말’ 가능할까? >다시 ‘예술 노동자’가 아닌 ‘예술가이며 노동자’로서의 삶으로 돌아와 질문한다. 예술가로 사는 것이 윤리적 삶의 실천일 수 있을까? 혹은 임노동자가 되는 것은 실천적 삶의 미학이라면 어떨까? ‘예술가’는 ‘예술가’로 고용되는 것이 가장 옳을까? 예술가는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탈주한 존재인가? 예술활동을 위한 자본을 독립적으로 구성해 낸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예술가’는 어떻게 공적기금을 죄책감 없이 쓰게 되었나? 공공 기금이 사적으로 운용되는 것은 정말 문제인가? ‘복지’는 왜 노동할 수 있는 권리와 거의 동의어가 되었나? 예술가는 언제나 ‘복지’의 사각지대에만 위치했었나? 예술가의 ‘특별한’위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동의하고 있나? 글을 마무리 하기 위해 서둘러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는, 스스로 무엇으로 존재하길 원하나?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떤 실천으로 지속되기를 원하나? <예술가로 살기의 윤리학, 혹은 임노동 하기의 미학> 콘템포러리 아트 저널, 8호, 2011 < Ethics for (Artist)Human Being or Aesthetics for (Laborer)Human Doing > Contemporary Art Journal , Vol.8,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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