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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전통에서 변방으로    
여성국극은 여성들이 남녀 배역을 모두 소화하는 국악연극이다. 판소리와 연극을 결합한 남녀 혼성 창극이 공연되다가,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의 <옥중화>(춘향전)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남성 역할을 맡으면서 여성국극이 시작되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에‘민족 오페라’로 불리며 열광적인 인기를 누렸고, 전후 침체된 대중문화계를 여성 예술가들이 점유하는 예외적인 역사를 남겼다. 전쟁의 여파로 남성들의 사회적 활동과 역할이 약화되었던 시기에, 일시적인 남성 부재의 공간을 장악하며 남장(여성)배우들이 무대에서 남성을 대신했다. ‘민족 오페라’라는 선전 문구는 전통과 서구화가 조우하고 경합하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절묘하게 조응한다. 국악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전통’의 범주에 속해 있지만, 판소리를 연극적으로 현대화했음을 강조하며 유입되는 미국 문화를 의식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여성국극 극단들은 창극임에도 불구하고, 연기력과 연극적 완성도를 위해서 소리를 하지 못하는 일반 연극배우 여성들과 연극계에 종사하는 무대미술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말하자면, 여성국극은 1950년대라는 과도기에서 창극과 연극, 향수와 혁신, 전통과 근대 사이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층성과 혼종성은 여성국극의 정통성과 위상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기제가 되었다. 여성국극은 남성 중심적인 공연계가 재확립되던 50년대 말부터 전통을 훼손시키는 근본 없는 아류나 퇴행적인 장르로 취급되었고 창극, 연극, 국악계에서 주변화하였다. 여성국극의 주요 소재였던 상고시대 권선징악 이야기는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서사로 치부되었고, (혼성)창극과 판소리만이 ‘전통’의 영역으로 소환되면서 여성국극은 국악의 순수성과 본질을 변질시키는 해악적 존재로 표상되었다. 그리고 당시 ‘순극’(정극)이라고 불렸던 일반 연극계에서도 여성국극은 예술성을 결여한 창극의 변종으로 간주되어, 독립적인 ‘연극’ 장르로 편입되지 못했다. 50년대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당시 창극과 연극계에 종사하던 유명 남성 극작가와 연출가들의 활동으로 가능했지만, 여성국극은 쇠퇴의 국면에서 창극과 연극계의 변방이나 외부로 밀려나게 된다. 따라서 여성국극은 한국연극사와 비평계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90년대 이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은 스타 주연 배우들이 결혼하고 여러 극단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작품의 질이 현격히 저하되었고, TV와 영화의 보급으로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성국극은 문화 정책의 제도적 육성과 재정적 지원의 결핍 속에서 1970년대에 대중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갔다. 80~90년대에 여성국극인들이 재결집하면서 여성국극의 부활과 재건을 위한 공연들이 활발하게 시도되었고, 2000년대에도 년 1~2회 정도의 여성국극 공연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시대적 감수성과 유리된 여성국극의 레퍼토리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장년층 여성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흘러간’ 공연물로 정체되어 있다. 그나마 1998년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된 <진진의 사랑>은 허구적인 설화 소재에서 벗어나 실제 여성국극 배우들의 삶을 극화한 창작극이라는 의미가 있다. 2008년에 공연된 <여성국극 Gala>는 일관된 연극적 서사 없이 여성국극 대표 작품들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옴니버스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여성국극 공연의 형식적인 실험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현 상황은 퇴조하는 여성국극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이지, 실력 있는 젊은 남녀 주연 배우를 배출해서 여성국극의 세대교체를 이룬 것은 아니다. 드물게 공연되는 여성국극 무대에서도 여전히 고령의 배우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정부가 지원하는 여성국극 국립극단도 없고, 여성국극 배우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체계적인 교육제도도 없으며, 여성국극의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현대화할 수 있는 극작가/연출가도 희박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국극 1세대 배우들의 안타까운 임종 소식은 여성국극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조처럼 다가온다. 여성국극의 ‘전통’은 사라져가는 유물, 지워진 역사가 될 위기에 놓여 있다.    
     
젠더 수행성의 연속성과 섹슈얼리티    
여성국극의 인기는 두 여성이 사랑하는 남녀를 연기한다는 점과 남녀 주인공의 매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볼거리가 없었던 전쟁 직후, 화려한 의상과 무대, 국악과 한국 무용,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대중을 위로하고 사로잡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인물을 연기하고, 박력 있고 낭만적인 남성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여성 관객들이 여성국극에 매료되었다. 여성국극은 이성애 로맨스가 동성인 여성 배우들에 의해 펼쳐지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경계,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을 넘나드는 모호함(ambiguity)의 쾌락을 자극한다. 여성국극의 남자 주인공들은 왕자나 장군, 충신/선비이지만, 동시에 춤과 노래로 상대 여성에게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고 여성 관객들을 유혹한다. 춤과 노래가 가미되는 여성국극이라는 공연 장르는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재현을 가능하게 했다. 춤과 노래는 현실의 남성에게 억압되고 절제되는 정서를 분출하고, 관능적인 교감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여성국극 배우들은 젠더(gender)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의복과 분장, 남성적인 어투와 동작, 남성적인 발성과 춤사위 등 남성성을 행위함으로써 획득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남성 인물이 여성의 몸으로 연기된다는 것은 젠더(gender)의 수행적(performative) 본성을 무대 위에서 그대로 구현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가 ‘타고난’ 몸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하는 일련의 젠더 규범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으로 젠더를 사고한다면, 남성성은 남성 육체의 고유한 자산이 아니며, 여성이나 비-남성 주체에 의해서 체화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생물학적’인 성(sex)과 젠더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면, 남성성은 생물학적인 남성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젠더의 구성적인 성격이 은폐되기 때문에, 자신의 젠더를 태생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서 여성이 남역을 소화하게 되면, 남성성이 연기를 통해서 모방될 수 있다는 것을 현저히 경험하게 된다. 물론, 버틀러는 여성이 남성성을 수행하는 것이 남자의 남성성(male masculinity)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원본’이라고 상정되는 규범적인 남성성에 근접하기 위해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남성들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을 모방함으로써 ‘남성’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젠더 수행 자체가 ‘모방’과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1 여성국극에서 남성 배역을 더 확실하게 연기할수록 배우의 연기력이 검증되기 때문에, 배우 스스로나 관객들에게 무대 위, 여성의 남성성 혹은 남성 젠더 수행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었다. 이렇듯, 연극성은 형식적으로 이미 퀴어(queer)적인2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여성국극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에는 2시간 30분이 넘는 작품들을 보통 하루에 3회 정도 공연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역 배우들은 ‘남성’으로 분장하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보냈다. 남성 인물로 육화된 시간이 집중적으로 지속되기 때문에 사실상, 무대 위의 남장 연기는 일상적인 영역으로 전이되기 쉽다. 더구나 극단 측에서 여관을 잡거나, 집을 얻어서 여성 배우들끼리 단체 합숙을 했기 때문에, 무대 위의 연극적 삶과 일상적 삶의 경계는 더욱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무대에서 여성들이 남녀 연인을 연기하고, 생활공동체에서 강한 친밀성을 나누면서 동성애적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남역 배우의 경우, 일상에서의 젠더 위반이나 비규범적인(non-normative) 젠더 실천도 ‘배우’라는 직업적 특성이나 연극성(theatricality)의 연장선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여성국극 무대는 현실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억압적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되었으며, 무대 밖에서 배우들 간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관계는 일종의 연극적 유희로 안전하게 통과될 수 있었다. 여성국극 극단 활동 경험이 있는 여성 배우들은 현재 60~80대의 나이지만, 자신의 실제적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이나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 동성애를 관용하는 퀴어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동성애에 대해 수용적인 것은 여성국극에서 경험한 젠더 공연에 친숙하고, 여성국극단체에서 동성애 커플들을 자연스럽게 접했기 때문이다. 무대 위, 여성들의 남녀 연인 연기와 여성국극 단체의 동성 배우 커플 사이의 연속성에 노출되면서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 남성 인물을 능숙하게 연기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남성 젠더 체현에 익숙해졌고, 남성성이 남성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끼나 흥을 발산하고 재미와 농담을 즐기는 배우들의 하위문화 속에서 여성들 간의 젠더 게임도 연극적인 역할 놀이처럼 향유될 수 있었다. 여성국극은 복장전환(cross-dressing)과 남역 연기를 통해서 유동적인 섹슈얼리티를 추동하고 증식시키는 효과가 있다.
 

1
여성이기 때문에 여역을 자동적으로 쉽게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대 위에서 인위적으로 형식화된 여성성을 연기해야하기 때문에 여성국극 배우들은 남역뿐 아니라 여역도 젠더 공연의 일환으로 접근하게 된다.

 

 

 

 

 

 

 

 

 

 

2
퀴어는 동성애자를 경멸하던 속어였으나, 이성애자와의 동화 전략을 거부하고 차이를 강조하는 퀴어 이론과 정치학에 의해 긍정적으로 재의미화된 용어이다. 성적 소수자나 젠더 소수자들을 아우르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원 범주들을 교란시키는 ‘비규범성’이나 ‘위반’의 뜻으로 사용한다. 배우가 허구적인 여러 인물들을 연기하는 연극적 장치는 정체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경계 넘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면에서 퀴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져가는 존재’의 회한과 열망: <(오프)스테이지 (Off)stage>    
 지난 11월 16일, 퍼포먼스 전시 ‘플레이타임’(예술감독 김성원) 중 ‘에피스테메의 대기실’(기획: 김현진)에서 공연된 <(오프)스테이지 (O)stage>(미술작가 정은영 연출, 조영숙 출연)는 한 희극적인 조연 남역 배우(삼마이)3의 삶을 조명한다. 여성국극 무대에서 60여 년을 살아온 조영숙은 죽음이 가까워지는 나이, 일흔아홉에 무대에서의 삶을 간절하게 희구한다. 조영숙은 1950년대 여성국극의 전설적인 남장 배우 임춘앵이 이끄는 극단에서 출중한 조연 연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60여 년을 여성국극 배우로 살아왔지만, <백호와 여장부>의 덥적쇠, <춘향전>의 방자, <청실홍실>의 수장이, <선화공주>의 철쇠처럼 조연이나 임춘앵의 대역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2012년 자전적인 솔로 퍼포먼스, <(오프)스테이지>에서 처음으로 남역 배우의 분장과 의상없이 조영숙이라는 여성국극 배우로 무대에 오른다. 허구적인 이야기나 상고설화의 조연 남성으로만 무대를 밟았던 그는 ‘지금, 여기, 여성, 그리고 주인공’으로서 무대를 전유하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독백한다. 고수의 북 반주와 함께 조영숙은 "돈타령"을 부르며 등장한다.

"돈타령"은 여성국극 전성기의 막대한 흥행 수익과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무대 밖 삶의 간극을 풍자하는 넋두리다. 그는 임춘앵 극단에서 돈 계산을 도우며 엄청난 양의 돈다발을 만졌지만, 그 돈은 극단 운영을 맡았던 사업부 남성들이나 임춘앵의 동거남들이 유용했다. 그리고 1961년 결혼했지만, 생계책임을 방기했던 ‘(부인)돈의 소비자’ 남편은 조영숙의 돈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가져갔다.

무대 정면 책상 위에는 흑백사진들과 대본들이 흩어져 놓여 있고, 라이브 카메라로 책상 위 물건들이 무대 후면 상단 벽에 실시간 영사된다. 그 벽에는 실시간 영상뿐 아니라, 공연 중간 중간 다른 사진 이미지나 여성국극 공연 장면들이 비춰진다. 이 벽은 조영숙 자신의 ‘과거’와 여성국극의 ‘역사’가 재현되는 공간이다. 무대 중앙에 앉아 있는 조영숙의 현재는 무대 위 높은 벽에 투사되는 과거와 재회한다. 조영숙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여성국극의 흥망성쇠와 함께해 온 자신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되짚어 꺼내놓는다. 왈가닥 소녀였던 조영숙의 십대 시절 별명은 숫도깨비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회고하며, 무대에서 남자로 신명나게 관객들을 웃겼던 ‘숫도깨비는 헛도깨비’였다고 말한다.4 무대에서 내려오면 남편의 경제적 착취를 감내하는 순응적인 여성이었고, 여성국극 단체에서도 세상물정에 어두워 사업부 남성들의 횡포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국극은 무대에서는 연기자 여성들만이 보이고 빛나지만, 작품의 기획, 극작, 연출 및 재정 관리, 극단 운영은 전적으로 남성 인력이 담당하는 성별 분업이 고착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성국극 배우들은 연기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적 경험이나 활동이 부재했기 때문에 독립적인 성인으로서 필요한 일 처리나 판단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다. 조영숙은 연극 속에서는 재담꾼 남성으로 무대를 압도했지만, 현실에서는 그의 어머니의 삶을 대물림했다. 그는 여성국극단체에 입단한 계기를 소개하며, 자신의 가족사를 들려준다. 조영숙의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조몽실 선생이었으나, 아버지는 딸과 부인을 방치하고 전국을 떠돌았고, 어머니가 삯바느질과 기생들 옷 빨래, 행상으로 홀로 생계를 책임지고 아이를 키웠다. 조영숙은 아버지의 피를 받아 무대에서 익살을 떠는 예인이 되었으나, 여자로서 어머니의 운명을 닮게 된다.

그러나 그가 여성국극 무대에서 연기자/예술가로서 열정을 맘껏 표출하며 느꼈던 희열은 삶의 원동력이었다. 조영숙은 단상 위 의자에서 내려와, 신발을 벗고 <견우와 직녀>의 "금강산 타령"을 부르며 재빠르고 현란한 발 스텝을 선보인다. 이 장면에서 그는 청춘의 숫도깨비로 돌아가 삼마이로 현신한다. 삼마이 가무가 끝나고 단상 위 의자로 돌아갈 때, 조영숙의 굽은 등과 느리고 힘겨운 발걸음은 애잔하고 숙연한 감동을 준다. 조영숙은 평소에는 노화로 등이 심하게 굽어 있지만 지금도 무대에만 서면, 거짓말처럼 등이 곧게 펴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역 배우를 오래하다 보면 가슴이 점점 작아지거나 없어지고, 남장 연기를 오래 쉬면 가슴이 다시 커진다는 신기한 몸 경험에 대해 얘기한다. 남성 젠더를 반복적으로 공연하다 보면 여성의 몸도 변형된다는 것이다. 여성국극 남역 배우만이 할 수 있는 몸에 대한 다른 증언이자, (재)구성되는 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조영숙은 여성 배우들의 극단 생활을 묘사하면서 단원들 간의 여성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자신에게도 마음을 품은 동료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때, <선화공주>에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시작되는 대목의 공주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5 연극적 서사 안에서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불길 같은 정성으로’ 애절하게 사랑하지만, 사실은 서동과 공주를 연기하는 두 여성 배우들이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멋진 남자 주인공을 마주하면, 여자인 줄 알면서도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함께 숙식하며 서로 아끼고 정을 주다 보면 연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을 부인 돈의 ‘소비자’로 지칭하고 이어서 여성 동성애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여성국극에 내장된 퀴어적 감수성은 유쾌하고 통렬하게 전달된다. 젊은 관객들은 연로한 여배우의 입에서 결혼에 대한 환상을 깨고 동성애 혐오를 반박하는 급진적인 발언을 듣는다. 조영숙이 여성국극 배우가 아니었다면, 노년 여성이 가질 수 없는 생각이자 할 수 없는 말이다.

조영숙은 공연 내내 한숨을 쉬며 여성국극 배우로서 지난 60년의 삶을 공연 시간 30분 안에 압축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토로한다. “할 말이 너무 많다”는 조바심, 언어화하지 못하는 잦은 한숨은 그만큼 여성국극과 여성국극 배우의 삶에 대해서 지금까지 들려진 말들이 적거나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초초함은 이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예감과 여성국극 배우로서 점점 더 무대에 설 기회가 없어질 것이라는 비애와 겹쳐진다. 조영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던 무대를 바라보며 건너편 무대 단상에 선다. “모든 것들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자신을 사라져가는 존재”로 느낀다는 대사에 이어, 그는 <견우와 직녀>에서 견우의 천상대목을 쓸쓸하고 한스럽게 부른다. 그러나 임춘앵의 대역을 하면서 서러움과 수모를 당해야 했던 조영숙이 견우의 창을 노래하며 주인공이 되는 장면은 치유적인 천상의 순간이다. 그의 과거와 여성국극의 역사가 영사되던 건너편 높은 벽에 구성진 창을 부르는 조영숙의 실시간 영상이 비친다. ‘물처럼 흘러갈’ 줄 알았던 세월이 ‘바위처럼 무거워 야속한’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여배우 조영숙의 모습이 실시간 동영상으로 ‘역사’의 자리에 기록된다. 남자로 분장했던 흑백 스틸 사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 숨 쉬고 움직이며 노래하는 주름진 여성의 얼굴로. 여성국극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한 여성국극 배우의 생애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역사로 새겨지며 클로즈업된다. 노래가 끝나면 조영숙의 젊은 시절 흑백사진 두 장이 나란히 벽에 투사되며 공연의 여운을 남긴다. 이국적인 무대의상에 짙은 남역 분장을 한 배우 조영숙과 단발머리에 한복 저고리를 입고 미소 짓는 여성 조영숙. 이 사진들은 1950년대의 시대적 풍경뿐 아니라, 무대 위와 무대 밖에서의 젠더 수행성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6

“(오프)스테이지”라는 제목은 단순히 ‘무대 밖’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층위를 함의한다. 무대 위의 허구적 인물과 연극적 재현이 담아내지 못하는 이야기, 무대 밖에서 ‘여성’으로 살았던 남장 배우의 삶을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의 재료가 되게 하는 것. 남성 중심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제외되어 왔던 여성 주변인, 여성국극의 역사적 담론에서 소외되어 왔던 여성국극 배우의 경험과 실존을 가시화하는 작업. 여성국극 삼마이 배우에 의해 구술되는 여성국극의 다른 역사를 무대 위로 복원시키는 재생의 의식. 무대 위의 남장 연기와 무대 밖의 일상적 삶 사이의 단절과 연속성을 추적하는 경계(border)의 미학이다. 그리고 점점 여성국극 무대가 줄어들면서 여성국극 배우들이 무대 위에 서지 못하고 무대 밖으로 배제되는 현실도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스테이지>는 소멸해 가는 전통적인 여성 공연 양식과 사라지는 여성 배우들에 대한 뜨거운 애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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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이는 대본 세 번째 장에 남역 조연 이름이 표기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50년대 당시, 많은 연극 용어들이 일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성국극들은 여전히 일본어로 지칭한다. 조영숙은 삼마이 용어의 유래를 설명하며, 자신은 삼마이지 ‘싼마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대사는 여성국극을 저급한 공연 양식으로 비하하는 시선을 꼬집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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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숙은 음력 삼월 삼짇날 태어났는데, 어머니 뱃속의 하얀 보(얇은 막)를 뒤집어쓰고 탯줄을 양 어깨에 X자로 메고 나왔다고 한다. 옛날 어른들은 삼월 삼짇날 여아가 태어나면 방정맞은 아이가 된다고 했고, 특히 남자가 흰 보를 쓰고 나오면 크게 되지만, 여자가 흰 보를 쓰고 나오면 팔자가 사납다고 여겼다고 한다. 조영숙은 흰 보를 쓰고 나와 여성국극에서 해학적인 까불이 남자, 삼마이로 대성했지만 여자로서는 정말로 모질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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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의 노래에서 서동을 가리키며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라고 한탄하는 가사는 여성국극 남장 배우의 삶과 여러 면에서 공명한다.
서동이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무모한 사랑에 헌신했듯이, 여성국극 남역 연기자들은 오로지 무대와 연기만을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여성국극 공연에만 집중했다. 따라서 무대 위에서는 세상을 호령하는 사내다운 남성이었지만, 무대 밖에서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취약하고 어리석은 여성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오프)스테이지>에서는 이 가사가 조영숙이 자신을 사랑했던 동료 여배우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대사와 맞물려, 남장 배우의 어리석음이 특수한 맥락으로 독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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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는 미국 문화가 유입되면서 신문이나 잡지 기사에서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되는 영어 사용이 성행했고, 대중가요에서도 이국적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노래들이 유행했다. 여성국극도 전통 소리와 춤으로 구성되었지만, 허구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무대의상이나 미술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양장이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숙한 여성은 한복을 입는다는 관념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다.
     
     
     
     
     
     
     
     
     
     
     
     
     


연극, 제4호,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