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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자본의 풍경을 점거하라
정은영, 작가


지난해 여름, 별나게 극성스러웠던 장마를 알리듯 연일 축축한 공기의 불쾌감이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 나는 인터넷을 떠돌며 회자되던 한 편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20여분의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딥포커스의 화면, 서툰 카메라 워크와 조작법이 빚어내는 간간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 20분의 의지에 마음이 요동쳤다. 이 영상은 부당 해고에 내몰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의 선두에 있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직접 찍은 소스를, 부산지역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공공미디어 블로그 ‘플로그 티비(www.plogtv.net)’가 다듬어 공개 한 것이었다.1 당시 김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의 85호 크레인 조종석을 점거하고 땅 위에서 약 35미터 가량 올라선 높이의 고공에서 농성을 200여일째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동영상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철저하게 김 지도위원의 시선과 일치한다. 카메라의 눈은 김진숙의 눈을 대신해서 거의 7개월에 달하는 시간 동안 35미터 높이의 크레인에서 그녀의 시각경험이 받아들인 정보를 압축한다. 그리고 그 위에 예의 그 유머러스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중첩된다. 나레이션은 종종 눈이 읽어내고 있는 실제의 상태를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풍경에서 비롯된 내재적 심상, 실제적 경험, 혹은 자의적 해석들을 담담히 구술한다. 카메라는 딥포커스의 롱테이크로 일관하는데, 흔히 딥 포커스는 카메라를 든 사람의 시각경험을 고스란히 재현해 내고자 할 때 자주 이용되는 양식이다. 의도적으로 시점을 조작하지 않고, 어떠한 하나의 중심으로 시선을 모아내지 않으며 화면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들을 균등하게 재현해 내고자 하는 촬영자의 의도가 담긴다.

“딱 베게하나 크기죠? 방이. 제가 생활하는 공간이 둘이는 못 눕습니다. 이 달력 하나 폭 정도 되는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전기장판이 거의 반으로 접혀있습니다.(...)여기가 난간입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밖이 바로 뚫여있는 구조니까 잘 걷지도 못했어요. 바람이 불면 굉장히 흔들립니다. 난간이 지지대가 있는게 아니라 많이 흔들려요.(...)이게 제가 밥을 매달아 올리는 밥보따리. 하루 세 번 저 바구니를 통해서 저의 식량이 조달되고 있습니다. 이 롤러를 통해서. 지상과 연결된 유일한 생존의 끈입니다. 이게 배수구입니다. 두 번째 설치를 한건데요. 처음에 설치를 했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날아가 버렸어요. 배수구까지. 그래서 새로 설치를 한 거구요...”2
“...그냥 제가 보는 전경은 한정돼 있습니다. 늘 똑같아요. 계절이 바뀐다고해서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가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늘 이렇게 녹슨 쇠를 더불어 살아야 되죠.”

나는 이 영상을 감히 근래 본 가장 훌륭한 “자본의 풍경”에 관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일반적인 삶이 유지되는 ‘높이’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무엇보다도 ‘몸’을 존재론적으로 장소화하는 ‘점거’를 실천하면서, 반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한 노동자의 눈은 자신의 신체가 직면한 ‘경관Landscape’을 어떻게 지각하고 무엇으로 인식하는지가 이 영상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화면은 35미터 높이에서 보이는 조선소 주변 지역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녀가 생활하는 크레인 위 작은 공간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시 조선소와 그 인접 지역들에 고정된다. 삶과 노동이 이루어 지는 장소에서 벌어진 일과,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구술하는 그녀의 나레이션은 간혹 웃음을 던지면서도 촘촘하고 단호하게, 차분하고 명료하게 크레인에 관한, 그리고 자신의 점거에 관한 서사를 이어간다. 영상은 꾸준히 카메라를 든 김진숙 본인의 크레인 위 생활과 그 주변의 전경을 객관적으로 ‘잡아’내는 것을 목표하는 듯 하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자신의 점거이유를 우회한다.

“저 건너편에 하얀 건물이 우리 조합원이 생활하는 생활관입니다. 6개월을 파업을 하면서 집에도 못가고 저 생활관에서 먹고자고 생활을 했는데 회사에서 조합원들한테 퇴거가처분 신청을 해서 그게 법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저기서 먹고자던 조합원들을 나가라는 명령서가 떨어졌어요. 참 잔인하죠...”
“저기 담벼락에 바퀴벌레들(용역)이 쫙 있어요. 보이시나 모르겠네. 이게 줌을 어떻게 하는 건가... 줌이....하여튼 줌했다치고. 저 담벼락에 늘 저렇게 닭장차가 와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뭐 불편하기도 하고 좀 그랬죠. 불안하기도 하고.”
“지금도 기억나는 게 주익씨가 굉장히 덩치가 커요. 키도 굉장히 크고. 그런 사람이 이 계단 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어요. 그게 그냥 애처롭고 안타깝고. 근데 그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난간을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구부린 채 왔다 갔다 했는지를 잘 몰랐죠. 제가 여기를 올라와보니까 그 사람이 이런 날은 이런 생각을 했겠구나. 저런 날은 저런 생각을 했겠구나. 그래요. 이제 와서. 결국 이 크레인 위에서 129일 만에 목을 맸습니다. 그 시신이 저기 놓여져 있던 자리가 있어요...”
“저기가 맨 도크입니다. 깊이가 굉장히 깊어요.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저기 도크바닥에서 2주일 만에 다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7년을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재작년에 사측이 정리해고의 칼날을 빼들었습니다.”


이 영상물의 많은 장면은 땅거미가 내려앉기 직전, 바다와 면한 도시의 낭만적 경관이 함축하는 정서적 차원을 불러 낼 수 있는 조건이지만, 감상자들은 아마도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아나가면서 ‘노을’을 기다리는 그의 서정적 감성을 낭만화 시킬 수 없다. 조선소 독크 저편의 아련한 풍경과 서서히 켜지기 시작하는 조명등들이 반짝거릴때, 감상자는 풍경을 향유하기 보다는 그 경관속에서 어떤 역사가 만들어졌는지를 차츰 알아가며 절박함과 참담함을 소환하는 것이다. 또한 놀랍게도, 근대적 산업현장의 표상인 거대한 기계장치로 빼곡한 조선소와, 속도와 소음을 끊임없이 감각시키는 8차선 도로, 그리고 그에 면한 신자유주의적 건축이자 주거공간인 몰형식의 고층 아파트를 한 프레임 안에서 목격하는 것은, 이 악랄한 초자본적 욕망이 향하는 혼재된 도시를 읽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드워드 렐프는 일찌기 이러한 도시화의 경관 양상들을 ‘무장소성Placelessness’라 이른 바 있다.3 역사를 지워내는, 혹은 그로부터 멀어지는 역사 없는 장소들,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화되고 획일화된 장소없는 장소들의 무장소성이 그녀의 프레임 내부에 깊숙히 자리한다.

“저녁이면 여기 나와서 이렇게 봐요. 그러면 저기 사람들의 마을에 불이 켜집니다. 아직은 어둡지 않기 때문에 불빛이 그렇게 반짝거리지 않는데 은하수 같아요. 그러면 생각하죠. 아, 저기서 누군가 가정에서 일하러 나간 아빠를 기다리겠구나. 그리고 일하러 나갔던 노동자들은 집에 돌아가 불을 밝히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겠구나. 우리 조합원들이 그런 일상을 빼앗긴지가 6개월이 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씻고 출근하고 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고 그런 일상들이 너무나 절박한 공간입니다. 너무너무 애절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이들이 와요. 아빠가 집에 못가니까. 그 가족들을 용역들이 막네요. 못 들어 와서 애들이 밖에서 울고불고 그걸 지켜보는 아빠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죄를 많이 짓네요. 돈 때문에. 돈 하나를 위해서 인륜을 져버리고 도덕을 져버리고 천륜을 져버리고 양심을 져버리는 이게 자본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말에 뭐 눈이나 하나 깜짝 합디까. 164일을 이러고 있어도 조남호 회장님한테 저는 투명인간입니다. 저기 배가 또 가네요. 배타고……. 아 근데, 그런 얘기 뭐 하려 하겠습니까. 노을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오늘은 노을이 없어요. 그냥 갔어요. 해가. 인사도 없이.”


서양회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풍경화는 자연의 낭만적 경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포악한 일면을 다룸으로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외감을 불러일으켜왔다. 또한 풍경화는 자주 미지의 대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자 탐험가들을 만족시켰고, 귀족이나 자본가들이 ‘소유한’ 부동산으로서 대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점차 ‘풍경’은 독자적인 장르가 되었고, 풍경에 대한 해석과 연구가 함께 진행되자, 차츰 풍경에 은닉되어 있던 정치적, 이념적, 계급적, 인종적 함의들을 추적 할 수 있게 되었다. 풍경은 단순히 미학적 표상이 되는 것을 넘어, 그것을 통해 풍경의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구성하고 이해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 되었다.4 때문에 현대미술에서의 이미지가 더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으로 접근되고 있으며, 대중매체 역시 이미지 아래 숨은 ‘말’ 들을 전방위적으로 이용하는 전략을 변함없이 즐겨 쓰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이미지의 너머를 읽어낸,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그에 개입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재현의 도구를 지니고 꾸준히 85호 크레인을 방문했다. 이 견고한 자본의 풍경을 지워내고 거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내부로 깊숙히 연루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재현의 도구를 들고 사건의 현장에 개입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딜레마를 경험하는 것이다. 일테면 ‘카메라’와 같은 도구는 언제나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을 포획하고 재현 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김 지도위원의 카메라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관객의 기대를 적중하지만, 타자의 풍경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외부인의 카메라는 거의 이 투쟁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김진숙을 향하게 된다.

타자의 삶을 재현하고자 할 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의 삶을 이미지로 ‘포획capture’하는 것이기 쉬우므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수잔 손택이 언젠가 ‘참여하는 자는 기록하지 않고, 기록하는 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방식의 포획으로서의 재현은 종종 연대를 가장한 타자화의 전형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어떤 경우에 매우 유의미한 전략이 되기도 하는데, 한 장소를 점거한 몸의 부피와 면적을 기록해 내는 것은 그 몸을 보이지 않도록/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싸움을 걸어오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위참여자의 수를 셀 때 시위대측과 경찰측의 추산량이 늘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더불어 이 방식은 김진숙 스스로가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빗대면서도 결코 스스로를 보이는 몸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이 영상을 벌충하기 위한 요구를 향한 응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더 보여드릴게 없네요. 하여튼 7월9일 날, 오세요. 오시면 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조남호 회장님한테는 안보이는 투명인간, 김진숙이가 여러분들의 눈에는 보이길 바랍니다...”

피말리는 저항과 갈등의 연속이었던 김진숙의 크레인 점거는 309일만에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엄청난 수의 개인들이 이 시간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크레인 아래, 수 많은 밤과 낮을 연대점거 하면서, 그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이용해 자신들이 보고 깨닫고 기억하는 것을 꾸준히 전송시켰고 그것은 거듭 RT되거나 Share되면서 보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로 유통되었다.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정리회고 철회 농성과 관련해 지난해 약 96만 4000여건의 트윗tweet이 발송되었다고 한 일간지는 집계했다.5 이후에도, 더 많은 곳에서 여전히 자본의 힘이 거침없이 사람들을 밀어냈고, 수 많은 장소들이 이와 흡사한 방식과 과정을 거쳐 밀려난 이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자본의 풍경은 순식간에 점거의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현현되는 장소로, 저항의 요구와 연대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재위치 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움직임 또한 빠르게 전개되었다. 지난 9월 17일 시작된 뉴욕의 ‘월가점거시위 Occupy Wall Street’가 세계 각지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점거’의 요구를 가시화 했다. 얼마나 많은 몸들이 ‘보이는’ 존재,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개별의 몸들은 공동의 몸이 되어갔다. ‘공동체’라 이를 만한 것이 자본의 포악함이 양산한 가장 살풍경한 경관속에서 오히려 집요하게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대항 권력에 의해 지워졌다가 스스로 다시 등장하는 보이기와 지워지기를 반복하면서 꾸준히 점거의 면적을 넓혀가고 있었다.

또한 역사를 지워내는 비장소에서 이들은 다시 역사를 기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타임Time>은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Protester’를 선정한다고 밝혔다.6 이는 세계적으로 매우 영향력 있는 한 시사지가 올해 튀니지와 이집트 등 아랍세계에 정치적 격변을 몰고온 반정부 시위를 위시하여 오큐파이 시위대에 이르기 까지 특정 단체나 개인이 아닌 ‘시위자’라는 개념이며 의미를 민주주의의 역사적 맥락으로 주요하게 배치하면서 저항으로서의 ‘점거’를 정식화하는 중대한 역사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의 서울, 서울시의회의 의원회관 로비는 이례적으로 ‘성소수자’들에 의해 점거당했다. 이 점거농성은 국내에서 단 한번도 ‘보이는’ 몸의 존재로 인정되지 않았던 성소수자 개인들의 연대체가 공적 공간을 점거하고, 그들 스스로를 존재론적으로 부각한 최초의 (문화행사나 축제가 아닌) 정치적 요구의 현장이 되었다. 이들의 점거농성은 학교내에서 학생/청소년이 ‘성정체성과 성적지향’,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조항을 삭제한 채 ‘학생인권조례’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에 필사적으로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성소수자 연대체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지만, 이후 보수 집권당과 기독교 진영의 극렬한 방해공작으로 인해, 의결된 조례에 대한 재의요구에 부딪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같은 시기인 지난해 12월 미술저널 e-flux는 예술에서의 ‘점거’를 전방위 적으로 다루면서 저명한 비디오 미술가이자 작가인 히토 슈테옐 Hito Steyerl이 쓴 예술과 삶과 점거에 대한 상당히 통찰적이며 실천적인 칼럼을 실었다.7 이 글은 점거의 의미와 예술에서의 맥락을 짚어내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자발적 삶을 위한 개인의 예술적 개입과 점거를 위한 성명이자 선동에 가깝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의 핸드폰의 비디오 기능을 켜고 무엇이든 기록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지속하라고. 우리의 손에 마음을 대신하는 이 ‘디지털 눈’을 통해 단지 부스러기처럼 남겨진 이미지들이 얽히고 탈주하고 저항하는 풍경이 될 수 있슴을 역설한다. 기록을 남기고 보내고 공유하고 재맥락화 해야함을, 거기에 우리가 점거할 영토가 있슴을, 언제 어디에서건 그것들이 우리를 매혹하고 있슴을 강조한다.8 히토슈테옐 식으로 말하자면 김진숙의 ‘디지털 눈’의 기록은 이미 나/우리에게 더 많은 기록을 남기도록 추동했다. 수 많은 이미지와 영상, 목소리와 유인물, 텍스트와 함성들, 매혹과 결의, 노래와 행진, 분노와 눈물, 웃음과 도전이 연대하는 다양하고 다른 개인들의 몸으로 부터 생산되어 공동의 체화된 생산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본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점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상실된 장소를 돌려받기 위해서, 우리를 몰아낸 그 자리에 남겨진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눈물겨운 투쟁의 장으로 밀어붙친 이 세계의 부조리한 풍경에 꾸준히 균열을 내기 위해서,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 몸들이 재현의 공동체를 조직하고자 하는 함성이 들린다.

“맞서라, 저항하라, 그리고 점거하라!”

1. 이 영상은 다음의 주소 http://www.plogtv.net/41 에서 볼 수 있다.
2. 이 글에서 인용하는 김진숙의 나레이션은 모두 위 영상의 나레이션에서 온 것이다. 위의 페이지에 역시 플로그 티비가 포스팅해둔 김진숙의 나레이션 녹취 기록본이 함께 실려 있다.
3.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 외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4. 김홍중 지음 ,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41-142p)
5. 한겨레 신문 2012/1/10 (http://www.hani.co.kr/arti/SERIES/298/514067.htm)
6. Time, 2011.12.24 / 2012. 1.2
7. Hito Steyerl, , e-flux, #30, 2011 (http://www.e-flux.com/journal/art-as-occupation-claims-for-an-autonomy-of-life-12/
8. Hito Steyerl, 같은 글.


<자본의 풍경을 점거하라> 프로젝트 <파산의 기술> 출판물, 2011 Report for the Art Project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