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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뜻밖의 기록: 다큐멘터리와 비디오아트의 사이
안소현,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정은영의 ‘여성국극(女性國劇)’ 시리즈는 1940년대 말에 시작되어 50-60년대 크게 유행했던 여성국극(모든 등장인물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창무극) 배우들, 특히 남역배우들의 분장과 리허설, 그리고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장면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촬영한 영상들이다. 이 영상들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공연 장르에 대한 논픽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기록 영상이며 다큐멘터리 영화의 성격을 갖지만, 작가의 독특한 카메라 설정과 과감한 편집을 통해 시각적 실험에 무게를 둔, 이른바 ‘비디오그래피(videography)’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상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르의 규정이라기 보다는, 작가가 선택한 비디오그래피의 요소들이 내용과 맺는 관계이다. 작가는 고정된 젠더의 이분법을 벗어나는 대상들을 다루면서 여러 가지 영상기법들을 사용하는데, 그 기법들은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의미 전달로 이어지는 하나의 시각 언어로 사용된다.

사라지는 것의 기록과 영상의 실험

은영의 여성국극 시리즈는 대상의 소멸 가능성 때문에, 작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록의 성격을 갖는다. 한 때 크게 유행했던 여성국극은 이제는 향유하는 관객수도 매우 적고 주요 배우들이 이미 70-80대의 고령이라 이 세대를 지나가면 계승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 대상을 기록한 영상들은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이 기록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수 밖에 없다. 대상 자체의 성격과 더불어 이 영상들은 이른바 다큐멘터리의 코드를 갖고 있다. 우선 움직임이 많진 않지만 부분적으로 핸드 핼드(handheld) 카메라로 촬영된 점이나,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이른바 토킹-헤드 인터뷰(talking-head interview), 실제 리허설을 녹화한 장면, 등장 인물들의 이름과 작품 정보, 대본의 소실 여부 등 사실에 근거한 정보들이 등장하는 점 등은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 영상들이 허구가 아닌 리얼리티를 전달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영상에는 내레이션도, 충분히 설명적인 이미지들도 없다. 예를 들어 분장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은 여성국극의 분장 기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으며, 배우들이 등장 인물의 연기방식을 설명할 때도 정보의 충실한 전달을 오히려 방해하는 편집들이 들어간다. 다큐멘터리에서 요구되는 사건의 증거로서의 기록의 신뢰도1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이 영상들은 다큐멘터리 영화라기 보다는 비디오 아트의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상들은 201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스크린에 상영된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전시라는 형태로 소개되었다. 또 영화의 형태로 상영될 때에도 여러 화면을 수직수평으로 분할해서 하나의 화면에 보여주었다. 작가에게 익숙한 활동 무대가 영화계가 아닌 미술계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영역의 벽이 생각보다 크다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일반적인 영화 스크린 앞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것과 전시된 영상을 통해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현저히 다르다. 정은영의 여성 국극 시리즈는 굳이 장르를 규정하자면 소위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의 성격을 갖는다. 이 장르의 발생과정을 살펴보면 왜 이 영상들이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와는 다른 특징을 가질 수 밖에 없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

비디오 아트의 역사에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갖는 작품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비디오 아트의 발생 초기에는 그런 성격의 작품들이 아주 흔했는데, 이는 그 발생 과정상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비디오 아트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에는 몇 가지가 있지만, 흔히 백남준과 볼프 포슈텔(Wolf Vostell)이 1963년 TV의 이미지와 주파수 조작을 통해 TV가 창조적 변형이 가능한 예술 매체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을 꼽는다. 이 때는 TV를 매스미디어로 보기보다는, 그것이 가져다 준 이미지의 변형 가능성과 공간적 편재성, 즉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동시에 전달하는 ‘전파’에 의한 결정적인 변화에 주목하였다.2 그러나 1965년 소니사의 포르타팩(Portapak)이 등장하면서 개인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기록, 저장, 배포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영상의 조작과 왜곡에 의한 효과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70년대에는 TV라는 매스미디어의 일방적 전달 과정과 대중 조작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대되면서, 자연히 TV와 구분되는 비디오는 매스미디어가 전달하지 않는 어떤 현실에 대한 시각을 전달하기에 탁월한 매체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많은 비디오 작품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졌다3.

이후 다큐멘터리는 차츰 비디오아트보다는 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진 비디오 아트를 굳이 특정한 장르로 분리해서 주목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 매튜 존 퍼킨스(Matthew John Perkins)에 따르면, 최근 10년 전부터, 특히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이후로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글로벌리즘 시대에 다시금 현실 고발의 성격을 가진 영상 작품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4. 요컨대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는 이미지의 형식적 실험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록의 성격을 모두 갖춘 장르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이 비디오 작품들은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달하는 데 주력하기 보다는 “존재하는 현실”과 “지각된 현실”의 간극을 보여주려 하거나, 시적인 비디오그래피를 통해 직접 바라보는 현실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목격한 사건을 분석하기 보다는 관객들의 본능적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함으로써 장편 영화에서는 흔치 않은 고유의 문법을 형성해 나갔다5.

유동적 젠더들

다시 정은영의 작품으로 돌아오면, 여성국극 시리즈 역시 다큐멘터리 비디오아트의 성격을 드러낸다. 즉, 기록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보여주는데, 우선 카메라가 포착하는 대상의 속성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짧은 전성기를 누렸던 배우들의 깊은 주름이, 바래지 않은 그들의 열정과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여성국극이 극소수 관객의 전유물로 남은 서글픈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면 밖의 현실이다. 정작 카메라가 부각시키는 것은 여성국극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아니라, 분장의 과정이나, 리허설 장면, 무대 밖에서 등장인물과 창법을 설명하는 장면 등이다. 그런데 이 때의 분장이나 연기는 남자처럼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남자보다 더 남자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리허설도 엄밀히 말하면 본 공연보다 완전하지 않은 과정이라기 보다는, 본 공연의 완전성의 정도를 정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실제로 리허설이 지향하는 미리 결정된 완전한 목표 같은 것은 없다(실제로 리허설에서는 많은 공연 내용이 바뀐다). 카메라는 완성의 지점이 불분명한 과잉과 흐름을 잡아낸다.

여기서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두 가지 젠더가 공존하는 지점이 아니라, 유동적 젠더들이 형성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여성국극은 확실하게 구분된 두 개의 젠더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주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모호한 젠더의 흐름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고정되지 않은 젠더는 여성 국극뿐만 아니라 ‘다른 성별인 체’하는 이야기를 담은 모든 예술 장르의 핵심이다. 관객들은 남장을 한 여성을 남성이라 믿고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인식을 놓지 않기 때문에 이런 장르에 매료된다. 즉 배우의 실제 혹은 무대 밖의 젠더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과장된 남성으로서의 젠더 간의 간극을 오가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국극 배우들의 남성보다 더 남성다운 연기나 분장은 바로 그 간극을 벌려놓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이 영상들이 주목한 ‘과정들’은 국극이 가진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은영의 비디오는 초창기 비디오 작품에서 등장하는 거울 기능을 수행하는 나르시시즘의 구도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영화와는 구분되는 비디오 매체의 특성으로, 화면 속의 인물이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인식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균열된 주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정신분석학적 나르시시즘의 구도를 강조한 바 있다6. 한 주체가 두 개의 역할을 수행할 때, 비디오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심리적 균열의 과정을 탁월하게 전달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특히 폐쇄회로 카메라나 비디오 설치에 의해 증식된 화면들은 주체의 이중성을 보여주거나 재귀적 효과를 부각시킬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정은영이 왜 모호한 과잉과 흐름에 주목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사실 배우들의 무대 밖의 모습과 공연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두 개의 젠더를 수행하는 주체를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굳이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과잉으로 채워진 과정들에 주목한다. 어쩌면 작가에게 한 인물이 복수의 젠더를 수행하는 것 자체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복수의 젠더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규정하기 힘든 젠더의 지점들이다. 이 지점들은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미세한 몸짓의 젠더

이 영상들에서 유동적인 대상과 함께 주목할 지점은 바로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다. 카메라가 정지 상태에 있을 때는 배우들의 설명을 경청하는 성실한 학습자처럼 보이지만, 막상 배우가 화면을 벗어나도 쫓아가지 않고 화면 밖의 목소리(voice-off)만을 담는 불성실함(?)을 보이기도 한다. 때로 카메라는 강한 클로즈업과 잰 움직임으로 배우의 진한 분장, 몸짓, 손짓을 과장하거나 분장하는 배우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각 장면들은 실제 공연무대처럼 암전으로 분절되지만, 공연 내용상의 마디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방점을 둔 감각적인 지점에서 나뉘어진다. 즉, 부채를 손바닥에 '탁' 치는 소리, 옷자락을 '착' 넘기는 소리, 갑작스럽게 내지르는 호통들이 이미지의 마디를 만든다.

작가는 왜 이렇게 성실한 기록자의 역할을 축소한 것일까. 여성국극에 대한 긴 작업의 과정이나 배우들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고려할 때 이런 편집 방식의 선택은 약간 의외로 보인다. 물론 이런 편집은 장편 영화에 비해 내러티브에서 자유로운 비디오 아트의 특권이다. 그러나 편집된 영상들은 단순히 비영화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기 보다는, 이미지의 특정한 내용을 부각시키는 언어적 기능을 한다. 우선 흐름의 절단은 관객들이 화면 밖에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감정, 즉 사라져가는 국극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끌려가는 것을 차단한다. 흔히 관객들은 카메라의 클로즈업이나 롱테이크를 그대로 따라가다가 어떤 감정이나 내러티브에 이끌려간다. 반면 영상이 의외의 지점에서 분절되어 버리면 감정선은 끊어지고, 단선적인 내러티브가 아닌 순간적인 이미지에 집중하게 된다. 배우들이 국극의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미지가 갑자기 끊어지면, 그 설명 내용을 따라 캐릭터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순간적으로 표현하는 감각적 소리와 몸짓에 주목하게 된다. 즉, 정은영의 카메라는 감정과 내러티브처럼 덩어리로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카메라가 잡아내지 않으면 흩어지기 쉬운 미세한 것들을 포착한다.

이 미세한 부분들은 대개 배우의 몸에 밴 특징들이라, 무대 밖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자 배우들의 목소리, 눈빛, 발걸음 등 신체의 능숙함을 통해 드러나는 남성성은 그야말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캐릭터와 연기법을 설명해주는 인터뷰 장면을 보면, 배우들은 분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성을 애써 드러내지도 않지만, 몸에 밴 남성성을 굳이 감추지도 않는다. 무대 밖의 모습도 남성적이며, 남성을 흉내내지 않는 대목에서조차 배우들은 어느 정도의 ‘남자다움’을 드러낸다. 작가가 본 공연의 장면이 아닌 분장이나 리허설, 배우들의 설명 등에 집중한 것도 이런 체화된 특징들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정은영의 작품에서는 유동적인 젠더를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 부각시킨 미세한 몸짓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이 작품들의 감각적 편집은 형식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작가가 주목한 고정되지 않은 젠더들을 드러내는 의미를 담지한 기호들이다. 따라서 그런 형식은 영화와 구분되는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얻기 위해 도입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주목하는 독특한 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감각적 요소 혹은 양태들이다. 따라서 정은영의 여성국극시리즈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가, 비디오 아트에 가까운가라는 처음의 질문은 영상 자체에 의해 자연스럽게 답을 얻는다. 가장 비디오 아트적인 요소들, 즉 감각적 특징들이 가장 다큐멘터리다운 요소, 즉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을 만들어낸다. 다른 말로 하면, 공허하지 않은 형식의 실험들은 가장 현실주의적인 메시지를 생산한다.

1.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옮김, 한울 아카데미, 2005, pp. 55-86.
2. 텔레비전 전파를 이용한 초기 작품으로, 1968년 게리 슘(Gerry Schum)이 설립한 “TV 갤러리”에서, 8명의 작가들이 대지예술의 이미지를 방송으로 송신한 경우를 들 수 있다.
3. 존 핸하르트는 비디오 설치(특히 폐쇄회로를 이용한 설치)가 가정용 싱글 채널 방식의 시청 개념을 거부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John Hanhardt, “The Passion for Perceiving: Expanded Forms of Film and Video Art”, Art Journal, 1985.
4. Matthew John Perkins, “Documentary Codes and Contemporary Video Art”,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Humanities, vol.8, no.4, 2010, pp. 177-182.
5. Ibid., p. 179.
6. Rosalind Krauss, “Video : Narcissism”, October, vol.1, spring 1976, pp. 50-64.



Encounter, 서울대학교 미학연구소,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