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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시대의 소리를 들어라
정은영(작가)


‘은막의 시대(Age of the Silver Screen)’로 불리우던 영화의 황금기는 의외로 ‘무성’영화 시대였다. ‘소리’를 이미지와 동기화 할 수 없었던 1920년대 이전 영화기술의 한계는 스크린에 고작 고요한 움직임을 투사할 수 밖에 없었지만, 대사 텍스트를 삽입처리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보완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내에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를 배치해 관객들의 감정과 정서를 최대한 이끌어내는 상영환경을 발명하는 것으로 그 한계를 극복했다. 영화 <아티스트The Artist>의 도입부는 이러한 무성영화시대의 상영환경을 촘촘하고 코믹하게 재현함과 동시에, 놀랍게도 무성영화 그 자체를 이 영화의 형식으로 전유할 것임을 밝힌다. 이러한 형식적/기술적 전략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술의 한계와 상관없이’ 오래간 대중의 감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왔음을 예찬하면서, 매체 그 자체로서의 영화예술의 본질과 기능, 한계를 또한 중대하게 부각한다. 이 영화가 시작할 때 관객은 1920년대의 무성영화 상영관에 앉아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무성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과거형’인 ‘소리없음’은 ‘현재형’의 관객들에게 ‘동시대성’을 사고할 것을, 영화적 ‘서사’이전에 ‘형식’의 존재를 고민할 것을, 그럼으로써 오히려 스크린 밖으로 나올 것을 꾸준히 요구한다. 관객은 서서히 무음의 지루함(혹은 전통)과 그 형식 파괴의 전향성(혹은 현대성) 사이에서의 당혹감과 갈등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 갈등을 단번에 무력화 하고 관객을 숨죽이게 하는 것은 단연 ‘소리’의 존재다. 섬약한듯 도전적인 음향 연출이 느닷없이 삽입되자, 영화는 순식간에 기술혁명이 완성한 예술적 페러다임의 위대한 혁신에 모두를 탄성하게 한다. 영화 속 당대 최고의 스타 조지(장 뒤자르댕)만이 다가오는 유성영화의 시대를 예견하지 못하는데, 유성영화에 대한 조지의 심리적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해 드디어 ‘소리’가 등장한다는 점이나, 남자 주인공의 로맨스를 완성하기 위한 상대역인 페피(베레니스 베조)가 유성영화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 한다는 설정은 영화역사를 플롯 안에 녹여내기 위한 다분히 전형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조지가 시대정신이 결여된 채 과거에의 향수에 젖어있을 뿐인 퇴물 예술가라면, 페피는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여는 떠오르는 신예이자 개척자가 되는 셈이다. 무성영화를 도구삼아 헐리웃 ‘로맨틱 코메디’의 문법을 순순히 따르는 줄 알았던 이 영화가, 돌연 관객들에게 ‘소리’의 존재를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자 내용으로 경험하게 함과 동시에 ‘로맨스’를 하나의 은유로 작동시킬 때, 이 영화는 가장 일상적인 상업용 장르영화의 규범과 언어를 가뿐이 뛰어넘어, 영화, 혹은 예술, 또는 시대적 요구로서의 매체형식 그 ‘자체’에의 표상이 된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내는 것은 언제나 예술가들이 직면한 가장 무겁고도 어려운 숙제였다. 나는 지난 서너해를 거의 <여성국극(50년대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창무극의 한 형태로, 모든 극중 배역을 오로지 여성만이 연기할 수 있다.) 프로젝트>에 매달려 왔는데,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의 문화예술계를 주름잡던 여성국극의 스타들을 당대가 아닌 현재에 만나 소위 동시대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언제나 녹록치 않았다. 여성국극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입을 모아 그 쇠퇴 원인을 시대정신의 결여로 분석해 낼 때마다 그것에 수긍할 수 밖에 없슴을 시인하면서도 부단히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오로지 배우로서 가장 화려했던 한 시절의 향수를 거듭 소환하는 것으로만 이후의 삶이 지속 가능했던 이 노년의 배우들에게 예술의 현대성/동시대성 따위를 언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지금, 여기의 예술을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비록 그들의 예술가로서의 삶이 지워지고 거절되는 시대를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마음으로 이해하면서도 시대의 요구에 맞서 협상하기를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그것은 매 순간 좌절과 열패감을 거듭 맛보게 하였으므로 영화속 조지가 마주한 거의 공포에 가까울만큼의 존재론적 위기는 여성국극 배우들의 삶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지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의 부름으로 구원받고, 그야말로 ‘아티스트’가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페피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의 앞에는 페피가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페피는 분명히 나타났을 것이다. 어쩌면 한번 이상, 혹은 수없이 많이. 그러나 페피는 ‘소리’이고 더구나 ‘들리지 않는’ 소리이며, 들리고 있을 때 조차 질감되지 않는 ‘물질없는’ 소리이다. 영화 초반, 조지와의 우연한 스캔들을 대서특필한 신문은 “그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 신문을 움켜쥐고 엑스트라 배우들의 오디션장에 나타난 페피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호명한다. “나는 페피밀러예요.” 영화는 여전히 무성 처리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보고 있지만 듣지 못한다. 시대의 요구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어느날 우리의 앞에 가로 설 지도 모른다. 예술은, 혹은 예술가들은 그것을 어떻게 눈치 챌 수 있을까? 고요한 ‘무성’의 시대라면 그나마 어렵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어차피 과거의 예술은 늘 ‘무無’를 ‘유有’로 바꾸어 내는 일이었므로.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의 시대, 이 재난에 가깝도록 소란한 소리들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에 응답할 것인가?

<시대의 소리를 들어라> 월간 아트인컬쳐, 2012년 3월호
Hear the Sounds of this Era> Art in Culture Magazine, March/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