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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나이듦. 자립이라는 영원한 목표.

서른 여섯이 되었다. 올해가 지나면 서른 일곱이 된다. 내나이 열 일곱엔 서른이 되면 인생의 역사를 멋지게 정리하는 자서전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열 일곱나이엔 서른 일곱이라는 나이는 거의 공상과학영화수준의 상상력을 필요로 했지만 한 해 한 해를 살아오면서 상상력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 서른이 넘도록 공부를 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종종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내가 원하는 가치있는 삶과 정치적 입장에 대해 다시금 소구해 보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실은 세상의 잣대에 크게 어긋남이 없기 위해 협상과 협상을 거듭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과거를 돌아보았다. Cv(curriculum vitae) 에 십수줄의 전시경력이 더 생겨난 것. 전국구의 보따리 장사 경력. 그 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이런것이 Cv(C'est la vie)일까?

친구들은 서른 전후에 거의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자동차를 샀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 종류의 일은 딱히 어떤 특정 지식이나 경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른 한살에 유학에서 돌아와 첫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부산행 KTX 첫 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번씩 부산의 한 전문대 디자인 과에서 포토샵을 가르쳤다. 첫차를 타고 가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고단한 일이었지만 그나마 공부를 했으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거라 자위하면서 새벽의 서부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왜 운면면허도 없고, 차도 없을까 하는 생각에 서러워졌다. 강사휴게실도, 강사를 위한 도서관출입증도 마련해 주지 않는 학교의 매점 한켠에서 라면냄새를 맡으며 책장을 몇회 넘기며 든 생각이었다.

이십대를 누구보다고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신하지만 그 깨알같이 많은 나날 동안 어째서 운전면허증을 따지 못한 것일까를 생각하면 참 나이브한 삶이였다는 생각도 든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에 담대하지 못하고 날마다 의료 실비 보험따위의 약정 조건을 뒤져보고 있거나 통장의 잔고를 의미없이 확인해 보는 일이 늘어난다. 어느덧 한참 늙어버린 부모의 건강 같은 것이 마음의 무거운 짐이고, 불과 얼마전 4대보험이 보장되는 직장을 때려치운 것도 눈치가 보인다. 갑자기 부모가 다리를 못쓰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불안감 같은것이 나도 모르게 심장을 옭죄인다.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렇게 시간 앞에 무력해진 자신과 나이듦에 대해 “외양간 고치기” 같은 것이었다. 전시가 있을 때 마다, 늙은 아버지에게 운전대를 잡게 하는 수고를 끼치는 것, 혹은 형제들이나 친구들에게 민망함을 무릎쓰고 대리운전을 부탁 해야 한다는 것에서 부터, 지금 이후의 삶에서 벌어질 어떤 사건들에 대한 대비이며 방어책인 것이다. 혹은 여전히 이루지 못한 완전한 자립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이후의 삶을 조금 다른 길로 우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욕구를 ‘운전면허’라는 고비를 넘기지 않고는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술을 전수하기. ‘먹물’이데올로기와의 투쟁

할아버지는 목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약 십년 전 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직접 짯다고 하는 체리목 색상의 묵직한 아버지의 책장이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요사이엔 왜 아무도 할아버지의 목공기술을 전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자주 생겨나곤 한다. 마무리가 꺼름직한 싸구려 집성목의 가구를 어쩔 수 없이 사야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어쨋거나 더이상 할아버지의 물건은 남아있지 않고, 할아버지도 더이상 이 세상사람이 아니다. 어느날은 아버지에게 한번도 목공소를 이어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없는지를 물었더니, 아버지도 그땐 왜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의문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더불어 당시 할아버지의 목공소에 유일한 기술자로 일하던 ‘최씨’가 늘 술에 취해 있었던 걸 기억해 내면서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긴 회상해 보면 할아버지는 늘 말끔한 양복에 광나는 백구두를 신고 포마드 기름을 바른 머리칼을 말끔히 빗어 넘기고 외출하기를 즐기던 분이었다. 장안의 수재이자 서울대생이 된 ‘먹물’아들을 둔 것이 더없는 자랑이었던 노인이 톱밥이 자욱한 자신의 목공소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기술’은 ‘학문과 예술’의 그림자임이 당연했다. 나 역시 종종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중 기술(painting skill) 만 뛰어난 아이들에겐 종종 독설을 퍼붓곤 한다. 기술은 자칫 속빈 강정처럼 철학과 내용을 담아내지 못할때 지나치게 평가절하되기 쉽다.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숙련도를 요하기 때문에 그 숙련의 과정안에 충분한 경험의 역사와 의미가 담길 수 밖에 없음에도 기술이란 언제나 정당한 질적 평가에 실패하는 것 처럼 보인다.

운전교습을 받으면서 운전교육강사들의 근로조건을 알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강사들이 주6일 근무에 하루 15-17시간의 극한 조건속에서 일한다. 하루 세끼를 모두 학원시설에서 해결할 정도로 개인의 여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식사 시간마저 끼니당 약 30분으로 무척 짧고, 50분 마다 10분의 휴식을 가지지만 하루 15시간 이상을 항상 똑같은 교습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그 지루함 속에서 기술적 숙련도는 원치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몸으로 체화된다. 혹독한 근로조건에도 불구하고 소위 “배운도둑질”이라 표현되는 직업적 운명론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전업은 쉽지 않다. 늘 술독에 빠져살던 목공소 최씨아저씨에게 만큼 이들에게도 기술은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생활의 달인. 아름답게 기술을 써먹기.

생활의 달인 같은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그 기술적 숙련도를 보여주는 대목에 이르러 누구라도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확신하건데 그 탄성속에는 그 기술의 숙련도가 목적하는 어떠한 효율성 내지는 실용성 같은 것에 대한 찬사는 없다. 그 탄성속에는 오로지 어떠한 기술적 숙련도가 재현해 내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미학적 체험이 있을 뿐이다. 봉투를 붙이는 섬세하고 속도감 넘치는 손놀림, 미세한 예측불허의 느낌만으로 정교한 시각적 현실화를 이루어내는 능력과, 수천 수만의 제품 속에서 불량을 솎아내기 위한 그 리드미컬한 몸짓의 반영들이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 수많은 ‘달인’들은 이 기술적 숙련으로 인해 자신들이 얼마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이로인해 얼마나 많은 폭의 임금인상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달인의 기술적 습득이 얼마나 아름답게 현현되는지를 직시할 뿐이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좀더 기동력이 생기게 될 것이고,  새로운 일을 하기위한 새로운 자원이 될 것이며, 나이들어 피곤한 몸이 보다 편해질 것이고, 자유로운 이동권이 자유로운 독립을 대변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기술을 습득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훈련’과 ‘체화’, 즉 온몸으로 감을 익히기 위한 무한반복과 그것이 아름답게 재현되는 “기술 그 자체”라는 목표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기술적 훈련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추적하게 되었고 자동차의 매카니즘과 정비,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운전기술이 지금보다 좀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지게 되면 운전과 관련된 다른 기술적 기반과 지식들을 익히고 싶다.

실용성, 효용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언어들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그 목적의 정당함에 역행하다보면 “loser”가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은 그 실용성과 효용성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자체미학의 범주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또한 그것을 습득하고 체현하는 주체의 직조욕망과 그 경험이 목적성 이전의 이행적 범주를 가능하게 하고 조직할 수 있다.  잠깐, 왠지 이런 말들이 낯설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온갖 불길한 예측들이 난무한 와중에도 우리가 끝까지 ‘예술하기’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아니었던가?




2009DYIforum
정은영


22세에 운전면허 시험에 8회 탈락한 이후,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환경주의자가 되거나 운전기사를 고용할 수 있는 재력가가 되고자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36세에 이르러, 재력가가 되는 것은 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 한 계급의 문제라는 사실을 뼈속 깊이 깨닫게 되었고, 현 정부의 녹생성장 정책과 문광부 장관의 자전거 출근 장면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구토증이 생겨난 바람에 환경주의자가 되는 것은 다음 생으로 미루기로 했다. <생활의 달인 >>이나 <프로젝트 런웨이> 따위의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기술이 아름답게 현현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고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했다. 현재 아름답게 운전하기 위한 훈련을 거듭하는 중이며, 근간에 자동차 정비와 유지에 관한 교육을 받고자 한다. 또한 40이 되면 직업훈련학교에 입학해 의상 패턴만들기 기술을 전수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