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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여성국극의 전통되기와 않기 Yeosung Gukgeuk:Tradition (Un)Realized 정은영(작가) |
Yeosung Gukgeuk: Tradition (Un)Realized siren eun young j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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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女性國劇)은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로 큰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창무극(唱舞劇)의 한 형태이다. 형식적으로 전통국악연희의 근대화/서구화된 양상으로, 판소리를 분창화(分唱化) 하고 장면화(場面化) 하여 연극적으로 무대화 한 ‘창극(唱劇)’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배역을 여성이 수행한다는 점, 그리고 전통국악의 다양한 장르들을 혼종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식적 장르로 분류 가능하다. 특히 여성배우들의 빼어난 ‘남역연기’는 언제나 여성국극 관극의 핵심이 되어왔다. 또한 그러한 특징 때문에, 일반적인 창극이나 연극과 구별되는 여성국극만의 차별성과 전복성을 고수할 수 있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한국의 공연예술 전반에 걸쳐 어떤 장르와도 어깨를 견줄 수 없는 주목받는 무대를 만들어왔다.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성과 기술력, 인력과 자본은 물론 팬덤까지 아우르는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이후 서서히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현재 여성국극은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며, 후속세대에 대한 교육과 투자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은 탓에 이제는 사실상 사장된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이 발표는 여성국극의 태동과 쇠퇴는 물론, 유신정부 이후의 근대화의 욕망과 ‘전통예술수립’ 이라는 국가적 과제에서 소외된 여성국극의 실패를 더듬으며, ‘전통’을 근대적 개념으로 포획해 남성패권의 도구로 이용한 당대의 ‘전통되기’의 역학을 비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더불어 이에 대한 발표자의 입장이 현대미술이라는 재현의 장에서 어떻게 다시 해석, 실천되고 있는지 소개한다. 여성국극의 짧은 역사 : 태동과 쇠퇴 역사적으로 여성국극의 시작은1948년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의 전신인 ‘시공관’에서 공연된 ‘여성국악동호회’ 제작의 창무극, <옥중화>로 알려져 있다.1 이 작품은 국악계에 만연한 남성들의 권위 의식과 폭력성에 반감을 가진 여성들이 국악계 내부를 벗어나서 여성들만의 무대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염원에서 시도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2 1948년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일본 식민정부의 해산과 함께, 기생 양성소인 ‘권번(券番)’ 역시 해체하게 되고, 이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여성명창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친다.3 조선시대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 만한 권번은, 조선시대의 관기제도(官妓制度)가 식민정부의 공창(公娼)제도로 변형된 형태였다. 해방 2년후인 1947년에 공창제도가 페지됨으로써 권번은 모두 문을 닫게 된다. 따라서 권번에 기적을 두고 활동했던 소위 ‘기생’들은 더이상 기생이 아닌 조선소리와 춤 등을 익힌 ‘예인(藝人)’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여성명창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명창들은 국악계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서게 된다. 구음전수(口音傳受)라는 국악의 전통적인 배움의 방식 때문에 사제간에는 엄격한 위계가 존재했음은 물론, 이것은 종종 제자인 여성들에 대한 성적, 경제적 착취를 동반했다. 더구나 직업상 충분히 성애화 되어있던 존재로서의 ‘기생’ 출신이라는 점은 이 여성들이 어떤 시선 아래 존재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방증한다. 반재식과 김은신은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에서 당시 국악계의 가부장적 풍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스승은 마치 절대 권력자처럼 군림했고, 여성들은 뒷바라지나 해주어야했다. 심지어 스승이 원하면 잠자리도 같이 해야했는데 그것이 싫으면 인연을 끊어야했다. 특히 금전적인 면에서 여성은 항상 박대를 받았다.4 이러한 풍토에 반기를 들고 1948년 봄, 명창 박록주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 여성들만의 단체인 ‘여성국악동호회’가 탄생하게된다. 이 단체의 회원명단에는 회장인 명창 박녹주를 비롯해, 박귀희, 김소희, 임유앵, 임춘앵, 조농옥, 김자경 등 당대 최고의 여성명창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5 전 근대적 관습과 통념이 만연한 사회를 가로질러 살아내야만 하는 근대적 여성주체들의 ‘행동’으로서의 여성단체의 탄생인 셈이다. 이들이 함께 한 최초의 여성창극 <옥중화>는 그러나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6 이는 가장 대중적인 사랑극 판소리 춘향전을 각색한 작품이었지만 관객들은 여성이 연기하는 ‘남자’ 이몽룡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작품에서 이몽룡은 임춘앵이 연기했는데, 당시 임춘앵 조차도 남역연기를 하는 것에 대해 충분한 내적 동기가 없었으며, 심지어 배역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이는 성별에 대한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이는 성별에 대한의 통념이 계급에 대한 통념보다 비교적 해체하기 어려운 것임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여성국극을 최고의 흥행한 대중문화로 이끌었던 전설의 남역 연기자가 바로 그 임춘앵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흥미롭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여성국극은 1950년대에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고, 1953년 종전 이후 부터는 여성국극 공연과 공연자들이 이 시기의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의 표상이자 우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임춘앵이 이끌었던 ‘여성국극 동지사 임춘앵과 그 일행’은 한국 전쟁 이전부터 60년대 후반 쇠퇴기에 이르기 까지 십 수년에 걸쳐 공연작의 거의 대부분이 큰 흥행을 기록했고, 이러한 토양은 수많은 여성국극 공연과 극단을 형성하며 여성국극이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한 시기를 만들어 낸다.8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미 두각을 보이던 여성국극공연은 심지어 전쟁중에도 피난을 다니며 공연을 이어가 그 인기를 지속했다. 이미 전쟁 이전부터 극단의 운영 체계는 물론, 연출과 구성의 토대가 만들어져 있었고, 배우들의 연기 훈련 또한 지속적인 공연을 통해 점차 강화되어 갔다. 종전 후인 1953년 이후의 활동은 그 어떤 공연장르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전쟁’이라는 물리적/심리적 상흔을 위로 받으려는 대중의 지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했다.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민중의 삶에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문화예술 공연은 오로지 여성국극 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은 그들이 추구하는 형식적, 내용적, 기술적 양식을거의 이 시기에 획득한다. 전통연희의 장을 현대화하고, 근대 공연예술의 기술적 진보를 기꺼이 수용했으며,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 춤의 연극성과 그 원숙함을 확보 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이로 인해 여성국극의 무대는 가장 비 시각적이고, 비 미학적인 시대적 불운 위에서 오히려 가장 시각적이고 미학적인 종합적 공연예술을 획득, 제공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성국극은 ‘집’이라는 가족 내부의 공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바깥’의 경험을 제공한다.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풍기문란’의 잠재적 위험으로 사고하던 전근대 동아시아의 성적 관념9 안에서, ‘여성들만의’ 활동이 가능함을 확인하고, 동성간의 커뮤니티를 향한 소속감과 헌신의 경험을 제공했다. 문화/젠더 연구자인 김지혜는 여성국극 배우군과 관객군을 심층 인터뷰 하면서 얻은자료를 기반으로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의 동성친밀성에 관한 연구>10를 쓴다. 이 글은 당대의 한국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여성국극의 특수성에 기반해, 여성들 사이의 정서적교감이나 열정, 성애, 연대, 우정, 감정적 애착등을 광범위 하게 포함하는 ‘동성친밀성’이라는 개념을 들어 여성 주체들의 경험을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은 근대를 경험한 여성주체들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의 억압과 불편함을 상쇄 할 만한 “안전한 여성중심적 공동체의 경험”을 매우 유의미한 것으로 이끌어낸다.11 강력한 전통적 성/성별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여성들의 성 분리 문화와 동성 친화성에 대한 지향을 고양시키고, 여성들의 자의식의 성장과 성관계를 위한 접근기회를 공급하고, 친밀성을 재 강화시킴으로써 여성들의 관계가 삶의 중요한 자원과 축이 되었다”는 것이다.12 한국전쟁이 끝나자 여성국극 단체와 공연작품의 수, 배우와 관객의 수는 빠르게 팽창하였다. 여성국극 역사에 남을 굵직굵직한 공연들을 앞다투어 선보였고, 극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여성국극 배우가 되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면서, 배우가 되기 위해 가출하는 소녀들이 다수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역량있는 걸출한 남역배우들이 상당 수 확보되었고, 배우를 제외한 연출, 대본, 무대 장치, 기획 행정 분야에도 타장르에서 경력을 쌓았던 이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렇듯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장르공연으로서의 내재적인 질적성장을 도모하는 한편, 공연 산업의 경제적 성장기반을 마련하고, 여성들의 주체성을 강화하는 강력한 사회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로 여성국극은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든다. 여성국극이 태동한 1948년부터 쇠퇴기로 접어드는 1960년대 말에 이르기 까지 여성국극공연을 다루는 신문기사만 약 6-700여건에 이르지만,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관련기사는 손에 꼽힐 정도로 현저히 줄어든다.13 헐리우드 영화처럼 보다 근대적인 양식과 스펙터클한 드라마가 대중문화로 맹렬하게 보급되는 상황 한 편에, 시스템을 다듬지 못하고 후배 배우를 양성하지 못했으며, 연기에만 몰두한 채 시대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던 여성국극 인력들의 시대정신의 결여 등은 그 쇠퇴의 원인으로 파악되어왔다.14 이와 더불어, 김지혜는 가부장제의 성별분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덧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마케팅, 홍보, 재정관리등의 행정, 운영 업무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여성 배우들이 자신들의 공연을 지속시키는 경제적 자본을 축적하지 못했고, 남성 사업부에 의한 악의적인 횡령이나 손실 등의 금전사고를 알아채지 못한 채, 현실적으로 공연을 유지할 수 있는 자원을 고스란히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15 또한 1970년대 군부독재정부의 전통문화제정사업이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여성국극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전통문화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없도록 남성 국악인들과 공모하였음에 강한 혐의를 둔다. 16 이와 같이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의 붕괴가 남성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다른 공연 조직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재기의 가능성과 기회로 부터 번번히 멀어지기만 했었다는 것은 성별에 관한 논의를 빗겨 가기 힘들다. 여성국극의 쇠퇴로 많은 배우들이 여성국극의 운명과 함께 쇠락하거나 비참한 삶을 걷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결혼으로 무대를 떠나거나 요리집 등에서 여흥을 돋우는 노래를 부르고,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초라한 장터 공연에 조금씩 등장하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전통적 성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적 요구에 적응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또한 일부는 당대의 스타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초라해진 무대에 결코 서지 않았으며, 해외로 이주하거나 완전히 다른 분야로 이동했다. 17 여성국극은 이렇게 역사에 커다란 빈 공간을 남긴 채,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후속 세대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른바 몰락의 역사를 걷게 된다. 1980년대 이후, 당시의 권위를 찾기 위한 몇몇 움직임이 드물게 시도되었다. 국가 문화기금 사업에 의존해 현재까지 약 200여편의 작품을 제작하는 등, 아쉽지만 의미있는 공연들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는 여성국극과 관련된 연구, 서적, 재현물들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국극의 부활을 꿈꾸는 이러한 치열한 움직임 속에서도 이미 초로의 노인이 되어버려 무대에 서는 것이 힘들어진 배우들이 많아졌고, 많은 수의 1세대 배우들이 노환이나 질병등으로 이미 세상을 등졌다. 발표자가 여성국극프로젝트를 가장 의욕적으로 끌고 나가던 2012년 8월,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투병중이던 조금앵 선생이 영면했다.18 이로서 1세대 여성국극 ‘니마이(남역주연)’는 생존과 거취가 확인되지 않는 김경수 선생을 제외하면,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사라져 가는 전 세대의 종적에 더해, 후속 세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여성국극의 무대는 나날이 비어가고 있다. 전통연희의 전복과 성별의 문제들 여성국극은 전통판소리에 기반하지만,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에서 대중의 시대적 요구를 수용한 새로운 장르의 공연양식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문화재청(文化財廳,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에 의하면,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 발림)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이고, “무형유산/ 전통연행/ 음악/ 민속음악”의 범주로 분류되어있다. (남녀혼성)창극은 이 정의에서, 한 사람의 소리꾼을 복수의 소리꾼들로 분창화하고, 고수를 악단으로 대치하고, 사설을 장면화/연극화한다. 그리고 여성국극이 다시 이 소리꾼들을 ‘여성’소리꾼들로 성별화 시킨다. 여성국극은 전통 판소리문화와 그 연행방식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 여타 전통 연희들과 혼종함과 동시에, 서구화 되어가는 당대의 근대적 혼종성을 수용하는 새로운 공연 양식으로 이행된 한 예인 것은 물론, 그 이행의 한가운데에 ‘성별’이라는 핵심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수하고 전향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판소리가 ‘극’의 형태로 이행하는 시기는 1910년 전후로, 거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창극의 탄생은 조선시대 최초의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알려져 있는 ‘협률사’의 개관과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시초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이른바 ‘식민지근대’라는 역사적 통로를 관통하면서 조선의 전통문화들은 근대화/서구화/일본화 되고, 1930년대 전후로는 순수예술의 ‘대중문화’로의 이행이 잦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 해방 직후에 창극은 스스로 ‘국國극’이라는 명칭으로 호명하면서 국가주의의 욕망에 동승했다. 여성국극 또한 ‘여성창극’보다는 ‘여성국극’이라는 호칭을 선호했다. 애초에 전통 판소리는 문학적인 ‘이야기(談話)’의 성격이 강하고, 담화가 객석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무수한 신호와 기호가 의미를 갖는 ‘텍스트성’에 기반한다. 그리고 이 의미는 ‘연행’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객석의 상호반응(interaction)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흔히 이것은 ‘추임새’라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공연학의 중대한 화두로 떠오른 ‘수행성’이라는 측면에서 판소리의 구조를 공연학적으로 정식화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판소리 전통에서 ‘귀명창’이라 불리우는 관객은 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을 기반으로 판소리를 감상하는 이들을 이르는 말로서, “귀명창이 소리꾼 낳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판소리의 판을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판소리에서 관객의 추임새는 공연을 격려하고 기꺼이 반응함으로서 공연이 수행되도록 하고, 공연 수행은 공연자와 수용자의 경계를 허문다. 공연 연구자인 김기란은 이러한 지점을 ‘수행성’과의 강력한 연동으로서의 공연으로 파악한 바 있다.20 여성국극은 이러한 지점에서 판소리의 연행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공연을 관습화 했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된 방식의 극장식 공연은 관객에게서 무대를 완전히 분리시킨다. 프로시니엄 극장의 무대는 하나의 판타지가 구현되어있는 공간으로 관객의 접근이나 개입을 불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여성국극 무대는 애초에 판소리 전통이 가지고 있던 상호작용을 거부하지 않는다. 관객은 공연 중 언제든 추임새와 박수로 자신의 느낌과 격려를 표현할 수 있고 종종 객석을 벗어나 무대로 이동해 공연자와 어울리기도 한다. 또다른 특수성인 여성 연기자가 다른 성별을 연기해야만 한다는 전제 역시 애초에 판소리가 한사람의 신체에 복수의 인물들을 현전하게 하는 연행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판소리 서사에 녹아있는 풍자, 해학, 골계의 미학 등은 언제나 여성국극 공연의 중요한 요건이었다. 객석을 사로잡았던 강렬한 시각성과 스펙타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식민근대를 지나, 국가적 독립과 함께, 식민국가에서 독립국가로 이동하는 매우 압축적인 변혁과 전복은 많은 이들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 설정하는 매우 도전적이고 중요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특히 어떠한 정치/사회/문화/경제적 상황에서도 이중잣대와 여러 제약에 부딛쳤던 여성들에게는 이러한 근대화의 급격한 ‘변동’은 일종의 압축적 스펙타클의 경험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국극이 표방하고 있는 여러 시각적인 스펙타클과 규범에의 전복들은 ‘당대성으로부터의 재현’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국극 무대위에서 ‘남복’을 하고 강인하고 멋있는 ‘남성’을 전시하는 행위는 새로운 신체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성애화하며 규율된 여성 신체로 부터의 도피를 꿈꾸는 전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국극의 의상과 무대의 강렬한 화려함은 객석을 가득 메웠던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신체/성별 변형과 시각적 매혹의 극적 경험을 선사한다. 반면, ‘여성들만의 단체’라는 일종의 ‘취약성’이자 내면화된 ‘수치심’은 스스로를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존재로 호명함으로써 극복하려는 국가주의 담론을 적극 수용한다. 1954년 ‘여성국악단 임춘앵’의 단가(團歌)에 드러나는 편집증적인 ‘민족’과 ‘전통’에 대한 수사가 이러한 관점을 증명한다. (1) 찬란하게 동이 트네. 우리 옥토에 잎 피었나. 진선미의 꽃봉오리 여성국악 여성국악 임춘앵 민족에 정기 모은 여성 국악단 국악예술 해 떠오듯 두둥실 비치우네. 아아 영광은 빛이어라 여성국악단 (후렴)아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 임춘앵 찬란한 국악 예술 창극의 깃발을 힘차게 날리세 펄펄 날리세. 창극의 깃발을 힘차게 날리세. 펄펄펄 날리세. (2) 파란 곡절 헤치고, 국악 전통 세워보세. 억만 가슴 기쁜 주는 노래하는 꾀꼬리 새 창극의 앞날을 성장하리니 민족 예술 수립에 힘을 다하세. (3) 우리 생명 영원하게 전심에 전력 태산칼이 높다 해도 오르고 또 올라 청사에 기리 남기라 민족 국악을 전세계에 빛나리라 우리의 노래21 임춘앵이 직접 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진 이 단가는 ‘여성국극 동지사’에서, 다시 ‘임춘앵과 그 일행’으로, 그리고 다시 ‘여성국악단 임춘앵’으로 단체의 명칭을 바꾸면서 보다 강력한 극단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만들어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가사 곳곳에 반복되는 여성국극을 민족의 전통예술로 확립하고자하는 열망은 단지 단체의 존재를 다지는 것 이상으로, 여성국극이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근거를 가진 공연이며, 단지 대중공연이 아니라, ‘국악’, 즉 국가주의의 기획에 준거하는 음악적 활동임을 강조하고 정식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이라는 패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은 ‘전통국악예술’의 위상에 끝내 포함되지 못했다. 여성국극의 인기가 서서히 사그라들어가는 전조를 보이던 50년대 후반, 여성국극에 관한 신문기사 및 칼럼들은 앞다투어 여성국극을 폄훼하기 시작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1976년 박황이 쓴 『창극사 연구』에 적극인용되어 있다. 스스로 창극의 극작가이기도 했던 박황은 창극사에 관한 첫 연구서인 약 300페이지 가량의 문고판 단행본의 거의 40퍼센트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여성국극의 출현과 쇠퇴에 관해 역설한다. 그리고 여성국극의 출현으로 한국의 ‘진정한’ (혼성)창극/국극계가 혼란에 빠졌으며, “창극부재”현상을 초래하였고, 명백하게도 이것은 여성국극의 죄과임을 역설하고 있다. (…) 여성국악동호회의 ‘햇님달님’은 관객으로 아우성이었으나, 부산극장에서 공연중이던 국극사의 ‘만리장성’은 관객이 여성국악동호회 햇님 달님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아니하였다. 이렇듯 여성단체의 출현은 초기부터 창극계의 혼란을 일으켰으며, 그 때문에 이제 겨우 제 정신을 차리고 ‘창극예술’이 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창극인은 치명타를 받게 되었고, 창극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24 창극계의 일류급만으로, 진용을 구성한 창극단의 ‘예술적 작품의 진가’를 뜻있는 사람과 식자는 인정하고 있으나 대중의 호기심은 여성극단의 속된 예제에 쏠리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과연 대중의 취미가 비속저조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창극예술의 진면목한 정진을 계속하고 있는 남녀창극인의 연기와 소리보다는 여성극단의 ‘카스텀 플레이(의상놀이)’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25 (…) 이 때문에 창극예술의 장래를 근심하는 사람들이 여성극단에 대한 비판이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일부 평론가는 여성극단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 송도가 망하려고 불가사리가 나왔다 하더니, 창극이 망하려고 불가사리(여성극단)가 나왔다. - 암탉이 울면 그 집이 망한다. 여자가 설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 일시적인 기현상이나 어쨋던 여성극단이 소람을 피우는 것은 창극계가 망할 징조이다. (…) -여성극단의 레퍼토리가 무슨 국극이겠는가.(…) 남녀창극인 모두가 창작하고 닦고 갈아서 전통창극을 정립하는데 다 같이 노력하라.26 이 여성극단이라는 불가사리가 생겨나서 한 때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가진 고난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왔던 창극단은 사라져 버렸고, 여성극단 자체도 결국 결딴나고 말았다.(…) 여성극단의 출현은 한마디로 말하면,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뿐이며, 속죄할 수 없는 죄과를 범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27 여성국극은 전통문화존립의 목표를 가지고 출현한 것이 아닐뿐더러, 완전히 현대적인 양식으로의 전환을 일구어 내기에도 미약한 지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박황의 일관된 주장은 여성국극을 부단히 ‘전통 창극’에서 분리시키고, 그 형식적 특징을 설명되지 않는 모호한 ‘원형’성을 들먹이며 여성국극의 고유성을 폄훼하는 것은 물론, 혼성창극만이 창극전통의 원형임을 무한반복하며, 창극쇠퇴의 모든 책임을 여성국극으로 돌리는 기이한 편집증을 보인다. 음악학자 주성혜는 여성국극을 전통예술로서 개입시키고자 하는 그의 글에서 ‘전통’의 본질적 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여성국극을 “한국의 문화전통의 정통성을 보유한 판소리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창이 모여 조악하게 만든 음악극” 따위의 평가가 ‘전통’에 대한 매우 본질론적인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판소리’와 ‘연극소리’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소리의 우열을 나누고 전통의 진정성을 논하는 것으로 여성국극을 폄훼하는 것은, 한 양식이 가지고 있는 전통을 재해석하는 양상과 고유한 실험적 특징에 관심을 두지 않은 편향된 평가이며, 우리 사회에 고질적으로 있어 온 전통과 현대의 갈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30 김지혜는 여성국극의 다양한 쇠퇴 원인을 분석하면서 여성국극의 구조적인 문제들에 다다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만의 조직’이 겪어야했던 어려움과 투쟁들로, ‘전통적 성별역할의 요구’에 따라 결혼에의 압박으로 인한 그룹 이탈과 더불어, 여성들이 오직 ‘배우’라는 한정된 역할 이외에 기획이나 연출, 사업과 같은 분야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신들의 무대를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점을 꼽는다. 31그는 더불어 ‘남성’ 평론가들에 의한 ‘여성 집단’으로서의 여성국극단체에 대한 편견어린 평가들을 반박한다. 남성 평론가들은 여성국극의 유명세로 인한 배우들의 스카웃 전쟁과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여성국극 단체의 창단이 불러일으킨 배우들의 이탈과 대립등을 ‘여성’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내분인 것처럼 곡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만 모인 탓에 감정대립, 시기, 질투가 만연한 여성조직”의 본질적 결함을 꾸짖는 주장들, 남성이 주도했던 여성국극의 ‘난립’을 여성극단들의 ‘내분’으로 비난하는 등의 실례를 들어, 남성비평가들의 성차별적 해석이 여성국극 단체들의 남성 이권 개입의 문제나 경제적 손실등을 은폐하고, 성별 분업 구조의 문제들을 여성들 간의 고질적인 알력다툼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폭로한다.32 나아가 그는 남성주도의 국악계 재편과, ‘전통문화 재정에 따른 국고지원’과 그에 집결되는 가부장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문화담론형성을 분석하는데, 1950년대 후반에 범람한 여성국극 비판들, 즉 박황을 필두로한 혼성창극의 ‘순수 창극’에 대한 규정이 여성국극을 의도적으로 타자화 시키고 있다고 반격한다. 또한 김지혜는 전 국립국극단 단장 김연수의 예를 들어 여성국극이 남성 창극인들에 의해 호도된 위상을 논증한다. 김연수는 1956년 여성국극의 위세에 눌려, 자신이 단장으로 있던 우리국악단을 여성국극 단체로 전환한 후, 배우 조금앵을 영입해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1960년대 초, 국립국극단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창극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영향력을 확립하고, 여성국극의 위상을 가치절하한다.34 이후 ‘창극’은 국가의 문화지원 사업의 요체가 되었고, 국립창극단이 발족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으로 자신들에게 부과한 ‘전통성’의 위상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물론 여성국극은 명백하게 이러한 문화패권주의의 희생자가 되었다. 김지혜의 주장은 따라서 ‘전통’의 수사학이 ‘남성중심주의’를 정식화하기 위한 패권경쟁의 도구가 되었음을 주지하고 있다. 여성국극의 전통되기와 않기 여성국극의 탄생과 쇠퇴의 배경에는 당대 문화권력의 역학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의 미심쩍은 양상들이 자리한다. ‘전통’을 수호한다는 것은 기실, ‘원형없는’ 개념을 도구로 이용해 얻어내야만 하는 일말의 패권과 관계한다. 근대성의 폭력은 언제나 이름없는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규범화시키는 것으로 시작했다. 규범 바깥은 어느새 타자화되고, 힘을 잃고 역사에 기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통’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 또한 매우 의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겹겹이 미심쩍은 ‘전통’이라는 하나의 규범을 신속하게 해체하고 그로부터 달아나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문화의 유산들, 징후들, 정동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예술실천으로서 발표자의 <여성국극 프로젝트>의 사례를 소개한다.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2008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여성국극’의 태동과 소멸의 역사를 다루면서 전통과 근대가 갈등하고 편성되는 과정에 연루된 문화권력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한편, 여성국극 남역배우 개개인의 삶을 조명하면서, 각 개인들의 모호한 열망과 정동이 사건을 만들고, 그것이 저항과 역사가 되고, 나아가 정치가 되는 과정에 주목한다.‘여성국극’ 공연과 그 구성원들의 커뮤니티를 밀착 연구/조사하며 만나게 된 주요 남역 배우들의 성별수행에 천착함으로써, ‘성별’이라는 개념으로 모여드는 규범과 통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가능한 저항 담론들을 재배치하며, ‘성정치 (gender politics)’의 미학적 가능성을 꾸준히 질문하는 것 역시 이 프로젝트의 목표이다.더불어 여성국극 커뮤니티의 대소사에 동행하며, 낡고 손상된 배우들의 아카이브를 뒤지고, 종종 방향을 잃는 장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목적 없는’ 리서치를 통해 얻어진 방대한 자료들을 분석하고 독해하는 한편, 해체하거나 재구성하여 현대미술의 문맥 위에 자리하게 하는 것 역시 작업하기의 중요한 과제이다. 여성국극은 80년대 이후부터 꾸준한 이론적 분석과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으나 대부분 문학적 접근으로 시도되어왔다. 이후, 공연학적으로나 여성학적, 혹은 무대미술과 의상에 관한 의류학적 연구들로 그 지평을 넓혀 왔음에도 시각예술의 분야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고 작품화된 경우는 전무했다. 대중문화라는 차원에서 근래에 와서 <왕자가 된 소녀들 (2011)>이라는 장편 다큐멘터리 한편과, 다소 각색된 단행본 만화시리즈 <춘앵전(2008~)>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발표자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소재적 측면에서는 물론, 여성국극이 내포하는 역사/ 성별/ 공연 등의 맥락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재해석할 뿐만아니라, 거의 사라질 뻔한 구체적인 여성국극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첫 미술적 연구이자 실천으로서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작품은 대부분 비디오와 퍼포먼스 형식을 통해 구성되며, 다분히 기록적이고 인류학적이며 계보학적인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그러한 특성을 오히려 의식적으로 거스르는 시각적 전략을 쓴다. 이러한 태도는 ‘성별’을 다시 말하기 위해, 성별규범을 낱낱히 해체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방식에 기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는, 이 모든 규범들을 ‘배우고 달아나는unlearn’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 Spivak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여성국극은 ‘전통’이라는 하나의 방식과 태도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거나, 배우고 달아나는, 혹은 ‘이루고 무효화하는 (un)realized’, ‘되기’와 ‘않기’의 역설을 가로지른다.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그 역설을 실천에 옮긴 결과이다. 이 자리에서는 2012년에 제작되었다가 2013년에 보다 완성된 형태로 다시 제작된 <(오프)스테이지/마스터클래스>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친다. 1.반재식· 김은신,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 백중당, 2002 , pp.87-99 2.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p.83-86 3. 김기형 외,「여성국극 60년사」, 문화체육관광부, 2009. p.78 4. 김기형 외,「여성국극 60년사」, 문화체육관광부, 2009. p.78 5.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p. 82-83 6.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98 7.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p. 94-95 8. 김기형 외, 위의 글 , pp.89-112/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p.100-487 9. 김미지,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여학생과 연애』, 살림, 2005 , pp.7-10 10.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의 동성친밀성에 관한 연구」, 『 한국여성학』 제 26권 1호, 2010 11. 김지혜, 위의 글, p.102 12. 김지혜, 위의 글, p.122 13. 김기형 외, 위의 글 중 신문기사 연보를 참조, pp.219-239 14. 반재식·김은신, 위의 책, pp. 606-615 15. 김지혜,「1950년대 여성국극의 단체활동과 쇠퇴과정에 대한 연구」,『한국여성학』, 제27권, 2호, 2011 16. 김지혜, 위의 글, pp.21-22 17. 김지혜, 위의 글 / 조영숙 지음,『무대를 베고 누운 자유인』, 명상, 2000 18. 「여성국극, 마지막 배우와 함께 스러지다」,『 한국일보』 2012.08.07 19.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3&VdkVgwKey=17,00050000,ZZ&queryText 20. 한국연극학회 편, 『퍼포먼스 연구와 연극』, 연극과 인간, 2010, pp.122-123 21.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p.355-357 (밑줄은 필자) 22. 반재식, 김은신, 위의 책, p. 357 23. 박황 , 『창극사 연구』, 백록출판사, 1976 24. 박황, 위의 책, p.189 25. 박황, 위의 책, p.201 26. 박황, 위의 책, p.228-229 27. 박황, 위의 책, p.260 28. 주성혜, 「전통예술로서의 여성국극 :주변적 장르를 통한 중심적 가치관 읽기」, 『낭만음악』, 제 20권 제 3호, 2008 29. 주성혜, 위의 글, p.171 30. 주성혜, 위의 글, p. 171-173 31.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의 단체활동과 쇠퇴과정에 대한 연구」,『한국여성학』, 제27권, 2호, 2011, pp. 9-12 32. 김지혜, 위의 글, pp.14-15 33. 김지혜, 위의 글, p.21 34. 김지혜, 위의 글, p.21-22/ 박황, 위의 책. | Yeosung (female) gukgeuk is a form of Korean theatre (Changmugeuk) that was widely popular in the 1950s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Formally, the style takes on modernized/Westernized aspects of traditional Korean traditional music performance and adaptations of pansori to create what could be called a staged version of traditional Korean opera. However, considering the style’s heterogeneous use of the many genres of Korean traditional music and the fact that all roles were played by women, it could be classified as its own formal genre. In particular, the female actors’ performances as men were always at the center of yeosung gukgeuk. Due to this aspect of the style, yeosung gukgeuk was able to hold on to a distinction and subversiveness that distinguishes it from ordinary opera and theatre. Yeosung gukgeuk came to the forefront of Korea’s theatre scene in the 1950s, creating a well-acknowledged stage with which few genres could compare. Even though yeosung gukgeuk was met with considerable success, acquiring artistic and technical capital as well as significant fandom, it gradually lost prominence after the 1960s. Today yeosung gukgeuk is barely being kept alive; left out of the education and investment for future generations, one could say that it is now an extinct genre.
This presentation deals with the emergence and decline of yeosung gukgeuk after the Yushin era, as it was marginalized by the desire for modernization and by the national establishment of traditional art, and brings a critical eye to the history of “creating tradition”—which was used as a tool of male dominance—and the idea of grasping tradition as a modern concept. Moreover, it introduces how such a critical stance is interpreted and practiced in the reenactment of contemporary art. The Brief History of Yeosung Gukgeuk: The Emergence and Decline Historically, the first yeosung gukgeuk came out in 1948 as Okjungwha, a Korean opera produced by the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staged at Shigonggwan, which later became Myungdong Art Theater. The dominant view is that this piece was made as an attempt by the women who harbored aversion to the authoritarianism of men in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world in the hopes of escaping the internal Korean traditional music world and creating a stage of women’s own. 1948 was the third year after the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zation. With the dissolution of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gwonbeon’—a training office for gisaeng, Korean geishas—was also dismantled, which eventually influenced the rapid increase of ‘professional’ female master singers. Gwonbeon, which was formerly a gisaeng call-office that generically controlled gisaengs in Chosun era, was a form of state-regulated prostitution of the colonial government as a replacement of the official gisaeng system of the Chosun dynasty. In 1947, two years after independence, state-regulated prostitution was abolished, which led all gwonbeons to shut down. Accordingly, so-called ‘gisaengs’ who had belonged to gwonbeon found an opportunity to perform as entertainers apt at the styles of Chosun’s singing and dancing, which ultimately resulted in a rapid increase in numbers of female master singers. Within this process, many female master singers confronted the patriarchal violence among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world. With Korean traditional music’s traditional learning method of oral transmission, there was a strict hierarchy between teacher and student, which often involved the sexual and economic exploitation of female students. Moreover, the fact that the women were formerly ‘gisaengs’ who had been professionally sexualized suggests the circumstantial evidence of social prejudice against them. Bahn Jaeshik and Kim Eunshin describe the patriarchal tendency of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world in The Biography of Im Chunaeng, the Prince of Yeosung Gukgeuk: “The teacher reigned like an absolute authority, and women were left to provide them with daily necessities. They were even forced to have sex when the teacher wanted, and rejection meant expulsion. In particular financially, the women were always treated poorly.” In response to such tendencies, in the spring of 1948 the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was founded as an all-female organization and elected its first president, the master singer Park Rokjoo. The members of the organization included the president Park Rokjoo along with Park Guihee, Kim Sohee, Im Yueng, Cho Nongok, and Kim Jakyung, who were the best female master singers at the time. The birth of such a women’s organization was a part of ‘action’ by modern women who had to live in a society of prevailing pre-modern customs and conventions. The very first female Korean opera Okjungwha was, however, harshly neglected by the mass audience. It was a dramatized version of the most popular pansori, Chunhyangjun, but the audience could not accept the ‘male’ Lee Mong Yong played by a woman. In this piece, Lee Mong Yong was played by Im Chunaeng, who lacked enough internal motivation to perform as male herself and even did not understand the part. This implies that the customs of gender were relatively more difficult to undermine than the customs of hierarchy. Nevertheless, it is paradoxically intriguing that Im Chunaeng was the one and only legendary male-performing actress that placed yeosung gukgeuk 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genres of popular culture. Through such trials and errors, yeosung gukgeuk began to appeal to the mass audience by the 1950s, and in the post-war period after 1953 their popularity was incomparable to any other performative genre, and the support of the mass audience, who longed to console their physical/psychological trauma of the ‘war’, had skyrocketed. At the time, it wa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yeosung gukgeuk was the only cultural art performance that was the closest to the people’s life after the war. Despite the brutal aftermath of war, around this time yeosung gukgeuk acquired the styles of their pursuit in terms of formality, content, and technique. It had contemporized the ground of traditional theatre, willingly accepted the technological progress of modern performance art, and immersed itself to maintain theatricality and the improvement of actors’ lines, singing, and dancing. Consequently, the stage of yeosung gukgeuk acquired and offered the most visual and aesthetic style of theatre art, ironically during a most non-visual and non-aesthetic time of historical misfortune. Furthermore, yeosung gukgeuk provided the experience of the ‘outside’ to women who could not get away from the internal, familial space called ‘home’. In the midst of the pre-modern sexual notions of East Asia, which regarded women’s extroversion as a potential risk of immorality, yeosung gukgeuk confirmed ‘women-only’ actions were possible and offered an experience of devotion and a sense of belonging to a same-sex community. Kim Jihye, a researcher of culture/gender, wrote A Study on Intimacy of the Same Sex in 1950’s Yeosung Gukeuk Community based on data collected through in-depth interviews of yeosung gukgeuk actors groups and the audience groups. According to the cultural context of Korean society at the time and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yeosung gukgeuk, the article interprets the experiences of female subjects with the concept of ‘same-sex intimacy’ which extensively encompasses emotional communion or passion, eroticism, solidarity, companionship, and emotional attachment. This interpretation drives out “the experience of a safe, women-oriented environment” into a greater significance, in which women could compensate for the oppression and discomfort of a male-oriented society. A strict traditional gender ideology in turn “encouraged women to seek and to intensify the separation of the sexes and their affinity with women, and offered proximity to mature women’s self-consciousness and sexual relationships, producing a possibility to extend gender transgression and homoerotic aspects on stage to everyday life”. After the Korean War, the number of yeosung gukgeuk troupes, theatre pieces, actors, and audience members had flourished. Numerous performances were produced, which later became substantial in terms of the history of yeosung gukgeuk, and theaters boasted drawing a full house in each session. As the number of women aspiring toward yeosung gukgeuk increased, it is known that several teenage girls ran away from home to become actors. More importantly, the supply of talented male-performing actors became assured, with a huge influx of personnel who had experiences in other field including producing, script writing, stage design, administrative planning, and so on. While the golden age of yeosung gukgeuk pursued internal growth in quality as a genre theater, it also prepared the economic foundations of the theatre industry and offered a powerful socio-cultural experience that reinforced the autonomy of women. However, after the 1960s yeosung gukgeuk faced a drastic decline. From the emergence of yeosung gukgeuk in 1948 to its decline in the late 1960s, the number of newspaper articles on yeosung gukgeuk amount to six to seven hundred; however, by the mid-1960s, the number of related articles had remarkably fallen to a mere handful. It has been understood that the reason for the decline amounts to a situation in which more modernized, spectacular dramas such as Hollywood movies had spread out into popular culture, whereas the people within the yeosung gukgeuk community failed to polish the system and educate the future generation, focusing only on acting, unaware of the movement of the times. In addition, Kim Jihye insists on the economic loss by the patriarchal gender differentiation of labor as the main factor of decline. In other words, marketing, promoting, financial administration, and operations were all dominated by men, which prevented women actors from accumulating economic assets to enable their continued performances. And while women were prone to malicious embezzlement or financial loss by male-dominating business, they eventually lost the resources to practically maintain the performance. Furthermore, it is of great accusation that the 1970s’ project on establishing traditional culture by the government of military dictatorship, in collusion with male Korean traditional music personnel, had deliberately omitted yeosung gukgeuk and prevented it from entering into the realm of traditional culture. The fact that female-oriented organizations had disintegrated much faster than other male-oriented theatre organizations and were further excluded from the opportunity to return, can hardly be discussed without mentioning the issue of gender. The decline of yeosung gukgeuk caused many actors to fall into misery along with the fate of yeosung gukgeuk. Often they left the stage with marriage, barely making a living from menial entertainment jobs in restaurants, or followed around peddlers to perform at rustic marketplaces, again adapting to the social demand that forced on traditional gender roles. Yet some had never gone up the humbled stage for all the world in order to uphold their dignity as renowned actresses, or gone abroad or moved to entirely different fields. Yeosung gukgeuk had left a huge space in history, never to be recorded properly, and underwent a so-called history of downfall, uninsured for the following generation and the future. After the 1980s, some rare movements attempted to recover the prominence of the past. After the 1990s, about two hundred pieces of yeosung gukgeuk were produced sponsored by the national cultural funding project. Although not entirely satisfactory, the performances certainly are significant. Moreover, research, books, and re-creations related to yeosung gukgeuk are being produced steadily. However, despite the ceaseless effort to revive yeosung gukgeuk, many actresses are already in their elderly age and several first generation actors have passed away, making it challenging to put them on stage. In the scorching summer of August 2012, when the Yeosung Gukgeuk Project was at its peak, master Cho Geumeng went to her final rest. After all, the last male-performing lead of the first generation yeosung gukgeuk—with the exception of master Kim Gyungsoo, whose whereabouts are still unknown—had disappeared. The stages of yeosung gukgeuk are gradually diminishing to absolute scarcity for the future generation. Subversion of Traditional Theatre and Gender Issues Although yeosung gukgeuk is based on traditional pansori, it created a new genre in terms of theatrical style that accepted the historical demands of mass audiences during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in Korea. According to Korea's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pansori involves a singer, paired with a drummer, telling an extensive narrative with combination of pansori (song), aniri (talk), and gestures" and is classified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traditional performance/ music/ folklore music”. Within such a definition, (co-ed) traditional Korean opera diversifies a single singer into plural singers, substitutes a drummer with a band, and dramatizes the narration. Yeosung gukgeuk then differentiates gender again, which turns singers into ‘female’ singers. Yeosung gukgeuk applied traditional pansori culture with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its theatrical style, along with characteristics of other traditional theatre, while transitioning into a new theatrical style that accepted modern diversity during the time of Westernization. In particular, it is certainly a special, avant-garde attempt that put ‘gender’ at the center of such transition. The period when pansori had shifted into a form of ‘theatre’ was around 1910, which occurred almost simultaneously with the beginning of Japanese colonial era. It is commonly known that the birth of traditional Korean opera was together with the opening of ‘Hyopyul-sa’ which was the first proscenium theater of the Chosun era, but it is not thoroughly confirmed. Through the historical path of the so-called ‘modern colonial era,’ Chosun's traditional culture became modernized/Westernized/Japanized and showed a tendency toward frequent transitions to ‘popular culture’ around the 1930s. Right after independence, within ‘the space of liberation’ at the height of creating a national anthem, Korean opera named itself ‘gukgeuk (national theatre)’ and jumped on the desire for nationalism. Likewise, yeosung gukgeuk preferred the name of ‘yeosung gukgeuk’ over ‘yeosung Korean opera’. Traditional pansori stresses its literary ‘narrative’ to begin with, based on ‘textuality’ that grants meaning to countless signals and symbols in the course of transferring discourse to the audience. Such meaning returns with interactions with the audience through the medium of ‘performance’, which is commonly known as ‘chuimsae’. In the context of ‘performativity,’ which is an emerging topic in theatre, this process offers a basis for the theatrical formalization of pansori’s structural elements. Moreover, within the tradition of pansori, a spectator who has a profound taste for and understanding of pansori is called a 'hearing master singer' who operates as an important factor in pansori; there is even a saying "a hearing master gives birth to a master singer.” The audience's chuimsae bolsters and willingly reacts to the performance, in which the distinction between performer and recipient becomes blurred. Performance researcher Kim Kiran recognized such a point as a performance that strongly interlocks with 'performativity'. In this sense, yeosung gukgeuk had customized a performance that actively accepts the method of pansori in its own way. Generally, modern theatrical performance separates the stage from the audience. It is typical for a stage of proscenium theater to limit the interventions of the audience, since it is a place where a fantasy is implemented. However, a yeosung gukgeuk stage welcomes the interaction that the traditional pansori had cultivated. The audience can express their feelings and encouragements with chuimsae or applaud any time during the performance, or even move up to the stage to interact with the performers. The premise that female actors played the opposite sex can also be explained by pansori's performance, which already includes the presence of plural personas within one body. The satire, humor, and comedy of pansori narrative were always at the core of yeosung gukgeuk. The compelling sights and spectacles that fascinated the audience can be explained with the following. Through the modern colonial era, with national independence, the condensed innovation and subversion of vast historical movements might have been a challenging experience to many people that repositioned themselves. Particularly, for women who faced double standards and several obstacles within any political/social/cultural/economic circumstance, such sudden fluctuation of modernization would have been a part of experiencing condensed spectacles. Consequently, the many visual spectacles and subversions that yeosung gukgeuk represents may be a 'reenactment of the contemporary'. When yeosung gukgeuk actors cross-dress as males and exhibit the tough 'male' persona, it might be a strategy to visually recreate a new body image and to escape from a female body that is sexualized and regulated. In this regard, the flamboyancy of yeosung gukgeuk's costumes and stages gives the majority of female spectators a dramatic experience of body/gender transformation and visual fascination. On the contrary, the vulnerability and internalized shame that come from a 'women-only community' actively accept the discourse on nationalism by naming the community a national being. The paranoid rhetoric on 'nation' and 'tradition' revealed in the 1954 community anthem Im Chunaeng of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proves such stance. (1) The day breaks ever so brightly. Leaves bloom in our rich soil. A bud of goodness yeosung gugak, Im Chunaeang of yeosung gugak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gathered spirits of nation. Gugak art, as sun rises and shines. Oh, glory is the light,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chorus) Oh, the longing name of our Im Chunaeng. The glorious gugak art, the flag of Changeuk (Korean opera) Let us fly the flag, the fluttering flag. The fluttering flag. (2) Through the ups and downs, Let us erect the tradition of gugak. The singing nightingale gives pleasure to millions of souls New Changeuk will grow in the future Let us do our best to establish national art. With all of our heart and strength, making our lives eternal Let the mountain be high and steep, we shall keep climbing National gugak shall remain immortal in history Our song shall shine throughout the world. This community anthem—whose lyrics are known to be written by Im Chunaeng herself—was created for the stronger identity of the club, changing titles from Yeosung Gukgeuk Comrades to Im Chunaeng and Company and again to Im Chunaeng of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However, the repetitive lyrics that project the desire to establish yeosung gukgeuk as a national traditional art more than confirm an identity which intends to stress the ‘traditional and national’ basis of yeosung gukgeuk supported by nationalistic projects and not just a popular performance. Hegemony Called ‘tradition’ Nevertheless, yeosung gukgeuk had not been included in the dignity of ‘traditional Korean traditional music art’ after all. In the late 1950s, when the popularity of yeosung gukgeuk began to dwindle, articles and columns about yeosung gukgeuk started competitively reviling the genre. The related content is actively quoted in Park Hwang’s Research on the History of Changeuk in 1976. Park Hwang, who was also a play writer, spends an extensive 40 percent of the 300-page paperback, his first book about the history of changeuk, to elaborate on the emergence and decline of yeosung gukgeuk. Park also addresses that the emergence of yeosung gukgeuk caused chaos in the ‘genuine’ (co-ed/mixed) gukgeuk/changeuk world and resulted in an “absence of changeuk”, whose blame is obviously on yeosung gukgeuk. (…) The Sun and The Moon by the Women’s Korean traditional music association was packed with the clamor of the audience, whereas The Great Wall of China by Gukgeuk-sa had hardly a third of the audience of The Sun and The Moon. Naturally, the emergence of yeosung gukgeuk had caused chaos within the changeuk world from the get-go, which eventually damaged the changeuk people who put in a budding effort to establish ‘changeuk art’ with a bare consciousness, and had shaken the very core of changeuk. Intellectuals and thinking people had acknowledged the genuine artistic value of the Changeuk company that organized the lineup with true aces; however, it was appalling that the popular mass’ curiosity was only on the crude entertainment of the yeosung gukgeuk company. It is uncertain if the mass’ taste is vulgar, but they are certainly more interested in costume plays of yeosung gukgeuk than the true artistic pursuit of male-and-female actors’ acting and singing. (…) For this reason, people who had been concerned about the future of changeuk art began to raise voices against yeosung gukgeuk, and some critics who had kept being silent severely criticized yeosung gukgeuk: “They say a starfish came out to ruin Songdo—a starfish (yeosung gukgeuk) came out to ruin changeuk.” “When the hen crows the house goes to ruin—when women crow the country goes to ruin.” “Though a temporary strangeness, it is a premonition of ruin that yeosung gukgeuk is making noise.” “Repertoires of yeosung gukgeuk are not gukgeuk at all.(…) Everyone should support the male-and-female changeuk people, who are sharpening the saw of traditional changeuk.” Because of this starfish called yeosung gukgeuk that had been vicious for a moment, changeuk companies that thrived through challenges had disappeared, along with the termination of yeosung gukgeuk. (…) To put it briefly, the emergence of yeosung gukgeuk had only left an indelible stain in the history of changeuk, committing an inexpiable sin. It was certain that yeosung gukgeuk’s motives of existence were not aimed at traditional culture, not did it have sufficient resources to cultivate a wholly contemporary style. However, Park’s persistent accusation constantly separates yeosung gukgeuk from ‘traditional Korean opera’ and disparaged the singularity of yeosung gukgeuk by bringing up elusive, inexplicable ‘prototypicality’ in terms of formality. While repeating at length that only co-ed changeuk is the prototype of traditional Korean opera, he shows a bizarre paranoia that claims yeosung gukgeuk is responsible for the decline of traditional Korean opera. Joo Sunghye, a musicologist, speculates on the fundamental idea on ‘tradition’. She argues that evaluation that regards yeosung gukgeuk as a “shoddy musical theatre, consisting of singers who are far less qualified than pansori, which owns the legitimacy of Korean cultural tradtion” is no more than a fundamentalist perception of ‘tradition’. To disparage yeosung gukgeuk by discussing the authenticity of tradition with a mere comparison between ‘pansori’ and ‘theatre singing’ is a prejudiced evaluation that does not consider the aspect of reinterpreting tradition with a singular style and a unique experimental quality, which does no less than display the conflict between tradition and contemporary that deeply embedded in our society. In turn, she claims that yeosung gukgeuk should be justly positioned in the realm of traditional art. In analyzing reasons for the decline of yeosung gukgeuk, Kim Jihye takes on the structural problems of yeosung gukgeuk. In particular, as an ‘all-women organization’, women went through difficulties and struggles that include departure from the organization according to the pressure of marriage, which corresponds to the ‘demand of traditional gender roles’ along with difficult circumstances in which it was difficult to imagine stages in a long-term perspective as a producer, director or jobs other than the limited role as an ‘actor’. Kim also refutes the biased evaluation of women’s gukgeuk organizations by male critics. To elaborate, male critics distort the competitive job offers towards popular yeosung gukgeuk actors and the conflict and leaving of actors caused by flourishing foundations of yeosung gukgeuk organizations, into an internal conflict that only occurs within ‘women’. Male critics employed discriminative arguments that claimed there was a fundamental flaw in an “all-women organization filled with emotional conflict, envy, and jealousy,” or criticized the confusion within the yeosung gukgeuk community brought on by men as an internal strife of yeosung gukgeuk, to disguise individual interests or economic losses related to men and to distort the structural issue of gender separation as a chronic friction among women. Moreover, she analyzes the patriarchal, nationalistic formation of discourse on culture pertaining to the male-dominated reorganization of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world and the support by national treasury for the establishment of traditional culture. As criticisms on yeosung gukgeuk had flooded during the late 1950s, Kim refutes the defining of co-ed changeuk as ‘pure’, with Park Hwang at the head of such definition, which had intentionally separated yeosug gukgeuk as the other. In addition, Kim takes the example of Kim Yeonsoo, a former head of the National Changguk Company of Korea, to argue for the misled dignity of yeosung gukgeuk. In 1956, Kim Yeonsoo, after being overwhelmed by yeosung gukgeuk’s popularity, changed the Woori Gugak Company into a yeosung gukgeuk community and cast Cho Geumeng onto wild success. However, as he was appointed head of the National Changguk Company of Korea in the early 1960s, he depended on changgeuk’s authority to secure his own influence and devalued yeosung gukgeuk. After that, changgeuk became the key factor of the national cultural project and was able to maintain its dignity of ‘tradition’ as bestowed with the national support. It was only natural for yeosung gukgeuk to become a victim of cultural hegemony. Yeosung Gukgeuk: Tradition (Un)Realized Looking at the decades of fervent support in modern/comtemporary humanities for Eric Hobsbawm’s claim of “the invention of tradition,” perhaps the crisis of yeosung gukgeuk can be discussed again in terms of research on ‘tradition’. According to Hobsbawm, characteristics of ‘invented’ tradition often include artificial impositions of continuity from the past and adopt a form residing in past circumstances, or reorganize a past of its own by enforced repetition. Also, such invented tradition is highly relevant to the historical innovation associated with nationalism, the nation-state, history, and so on. In this sense, the rhetoric of ‘tradition’ accompanies the myth of a powerful nation that attempts to establish a male-oriented nation-state on a modernized path. Backdrops of the emergence and decline of yeosung gukgeuk contain doubtful elements that represent the way cultural power dynamics operated at the time. To preserve ‘tradition’ is in fact related to part of the hegemony that uses the concept without a prototype as a tool. The violence of modernity always began with standardizing and naming the unnamed. Before one realizes it, what is outside of the standard becomes marginalized, losing its power to be recorded in history. Therefore, reinterpreting ‘tradition’ is a skeptical task as well. Nonetheless, the case of the Yeosung Gukgeuk project is introduced to promptly deconstruct an ever-skeptical notion of ‘tradition’ and as an artistic practice that explains numerous cultural inheritances, symptoms, and affects that prevent it from escaping. The Yeosung Gukgeuk project began in 2008 and is still ongoing. The project reveals the ideology of cultural power related to the process of conflict between tradition and modernity by considering the history of the emergence and decline of ‘yeosung gukgeuk’ while casting light upon the lives of each individual male-performing actor and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ir elusive desire and affect created events which became resistance, history, and eventually politics. By delving into the gender performance of male-performing actors found during in-depth research on yeosung gukgeuk, the project aims to critically analyze norms and customs that converge into a concept of ‘gender,’ reorganize possible discourse on resistance, and inquire into the aesthetic potential of gender politics. Aside from that, crucial tasks of the project include accompanying any happening within the yeosung gukgeuk community, digging into old actors' archives, and analyzing extensive amounts of data collected through bits and pieces of often aimless interviews while reconstructing them to place them within the context of contemporary art. Theoretical research on yeosung gukgeuk has been persistent since the 1980s, although most of it attempted a literary approach. While various research fields including theatre, women's studies, or apparel studies on costume and stage design had dealt with yeosung gukgeuk, new work related to visual art was nonexistent. It was only recently that a full-length documentary film called Girls Prince (2011) and a dramatized paperback comic book series of Chunaengjun (2008~) came out in the realm of popular culture. In this sense, the Yeosung Gukgeuk project has a significance as an introduction and re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gender/performative context that yeosung gukgeuk implies, and as the first artistic research and practice that deals with the detailed history of yeosung gukgeuk, which was at risk of disappearance. Most pieces are composed of video and performance, and are at the same time substantially record-oriented, anthropological, and genealogical and in turn use a visual strategy that consciously rejects such characteristics. Such an attitude owes itself to Judith Butler's deconstruction of gender norms in order to reinstate gender. On the other hand, it might come from Gayatri C. Spivak's approach of 'Un/learning' all of those norms. Yeosung gukgeuk supersedes the paradox of ‘becoming’ and ‘not becoming’ by deconstructing and reconstructing one attitude called ‘tradition,’ learning and escaping, or ‘realizing and unrealizing.’ The Yeosung Gukgeuk project is the result of such a paradox in practice. The presentation will conclude with the introduction of (Off)Stage/Master Class that was originally produced in 2012 and re-produced in 2013 with a greater degree of comple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