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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1. 흐름, “모든 안착한 사람들”[1]에게 ‘안착’이라는 말 누군가의 혀가 스르륵 척 입안에 달라붙는 것 같아요. 깨 버리라 부숴버리라 속삭이는 붉은 것들 이십대에 우리는 만났다. 어느 시인은 서른 이전의 생을 날달걀에 비유했지만[2] 그 시절의 정은영은 깨지기 쉬운 껍질과 거리가 있어 보였다. 말수가 적은 대신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동자는 혼란이 오더라도 쉽게 들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발하고 있었다. 내가 삼십대의 삶을 본격화할 무렵, 그녀는 ‘여자답게’ 훌쩍 영국으로 떠나갔고 우마드(womad)의 생생한 삶을 풍문으로 들려주곤 했다. 2002년, 가제트도 아닌 그녀의 손이 영국에서 서울의 내게로 갑작스레 날아왔을 때, 그것이 죽음에 가까운 온도를 품은 것이어서 약간 놀랐던 것 같다. 강은수와의 공동작업, 제2회 여성 미술제 참가를 위한 일종의 연대의 형식이었다. 「차가운 손을 가진 이방인의 이야기」. 냉기와 온기가 사생( 死生)을 가르는 표지라 여겼던 나는 이토록 차가운 손이 움직이고 말을 걸고 울기도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몰랐다.[3] 정은영은 이 작업에서 서사를 담당했다. 그때의 그녀를 찾아 읽어본다. 나는 말했다. 당신이 머무를 곳을 찾는 그 여행, 나와. 함께. 하. 지. 않을래요. 나는 숨을 고르며 여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자가 거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함께가 아니어도, 우리는 어차피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지난한 여행의 끝,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의 어디쯤에서 다시 서로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여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손에 쥐고 있던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놓고, 나의 제안에 대답하는 대신 그 푸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기쁘게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나에겐 이 푸른 손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의 화자를 정은영과 동일시해도 좋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에 대해 몇 가지를 알게 된다. 먼저, 틈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단단한 껍질은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 그녀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자아를 가졌다. 소심하다가도 필요한 순간 적극적이고 열띤 존재로 변모한다. 이야기 속 그녀는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여자의 푸른 손을 머뭇거리면서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게 분명해요. (……) 당신과도 역시 소통할 수 없을 테죠.” 차가운 손을 가진 여자의 서늘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침묵의 냉기를 뚫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은영의 서사에서 가장 팽팽한 긴장감과 열렬함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그녀의 열렬함에는 거절의 불가피함을 긍정하는 무심함이 있다는 것. 쉬크함이라 일반화할 수도 있겠지만 스타일을 껴안은 방법론으로서 이 태도를, 도나 해러웨이라면 ‘열정적인 초연(passionate detachment)’이라 명명했을 것이다. 이를 빌려 나는 열정과 초연 사이의 어떤 맞잡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스침, “이때 대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살갗이다.” 인생이 연극이라 말할 때의 배우, 표정. 극중극의 회전무대처럼 어떤 삶이 휙 지나간다. 매캐하게 먼지가 인다. 늙은 여자가 화장에 몰두하고 있다. <분장의 시간>(2009) 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주름인지 쌍꺼풀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공간 위, 마스카라 붓끝이 힘차게 그녀의 성(性)과 나이를 지워나간다. 여성도 남성도 아니고 이팔청춘이 아닌데 울긋불긋한 젊음이 인장처럼 찍힌 이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사이보그’라 해보자. 뭔가 모자란 듯하다 ‘할매’라는 말을 붙여본다. 오랜 길을 걸어 예까지 온, 가까우면서도 먼 미래들.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젠더의 교란자, 사이보그 할매들 조금앵 선생의 부음을 듣자마자 정은영의 얼굴과 실루엣이 떠올랐다. 영정 앞에서 조심스레 약간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뒷모습. 그녀를 대신하여 전한다. 고인이여, 부디 평안하시기를. 국극에 대한 안내를 겸해 선생의 부고 기사 일부를 소개하겠다. 여성국극의 최고 스타 조금앵 씨가 지난 3일 별세했다. 82세. (……) 195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은 창·전통무용·재담으로 구성된 전통극으로, 출연진은 전원 여성으로만 꾸려진다. 고인은 남장을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당대 최고 인기 예능인 중 한 명이었다. 그를 흠모한 여성 팬과 가상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4] 조금앵 선생이 올린 가상 결혼식은 부고기사에 실릴 만큼 고인의 삶을 선명하게 형상화하는 장면이다. 정은영은 이 에피소드와 사진을 활용하여 <웨딩>(디지털 프린트, 2011)을 만든 적이 있다. 작품 속 신랑에게서 우리는 여성의 표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녀는 얼굴선이 곱고 부드러운 청년일 뿐이다. 생물학적 성의 경계를 지운 이 캐릭터는 세팅된 무대를 넘어 현실에까지 출몰했다. 정은영 작품에는 어느 단원의 결혼식 때 남장을 하고 신랑 들러리를 단체로 섰었다는 선생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만능 배우, 사이보그들은 현실을 교란하면서 “끊임없이 무대를 다시 짜고 있다.” 귓전에 “배우, 곧 행위자들은 사이보그”라는 해러웨이의 속삭임이 들린다.[5] 사이보그의 미술적 재현으로 손꼽히는 것은 신체-기계의 잡종적 인공물과 괴물의 비체적 형상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사이보그가 특별한 기계장치나 신체 왜곡 없이도, 현대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나아가 사이보그는 ‘여자/남자, 자연/문화 같은 범주적 구별을 의도적으로 흐려버리는’ 주체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에게 규범화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젠더의 범주를 교란하는 국극의 남역 배우들은 그야말로 사이보그적 주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브라이도티, 2004: 176). 정은영은 젠더적 권위가 허상임을 몸의 맥락에서 실천해온 원조 사이보그들을 카메라로 포착하여 그 전복성과 역사성을 짚어준다. 또한 국극 배우의 개별적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이들이 복수적 차이를 지닌 존재들임을 보여준다. 조금앵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80대 노인으로 20대 남성의 역할을 소화하는 ‘니마이’(남자주인공으로 대본의 두 번째 장에 이름이 표기되는 데서 유래한 명칭) 전문배우였다. 남역에 몰입해 있을 때의 그녀는 신체적 정체성도 남자의 그것에 가까워져서,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연기하다 무대에서 낙상을 했을 때도 임신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고백은 직업적 프로정신을 넘어 반복적 수행이 신체의 뿌리까지 지우게끔 하는 젠더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애꾸>(디지털 프린트, 2011)는 ‘가다끼(남녀 주인공의 연애를 훼방 놓는 악역을 칭함)’ 전문배우였던 이소자 선생의 에피소드와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그녀는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차고 악한다운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이미지의 탄생 비화가 흥미롭다. 정은영에 따르면, 현실의 이 선생은 무대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분이라고 한다. 이 사진을 찍을 무렵, 선생은 미용을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한 상태였다. 이를 감추기 위해 안대를 착용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더욱 강렬한 가다끼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이소자 선생은 자연인과 배우의 분리점을 강하게 인식함으로써 삶의 수행성을 체현하고 있는 사이보그라 하겠다. 사이보그로의 수행적 역사와 현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에 담긴다. <리허설>(2009)은 무대화 과정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본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지시의 언어들은 하나의 수행을 지향해가는 ‘움직임의 과정’으로 의미가 심원하다. <마스터클래스>(2010)는 현재 대본이 유실된 <무영탑>(2010)의 기억 칩을 내장한 사이보그 김혜리 선생이 펼치는 모놀로그 연출 역할극이다. 배우로서 존재감이 약했던 선생은 몸 대신 두뇌를 작동시키고 그 힘으로 신체를 재가동함으로써 이 흥미로운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여성들의 칼싸움은 어떠했을까, 남역을 수행할 때 어떤 몸짓이 고정화된 젠더의 비어있는 중심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칼싸움을 잘했지… 묘기에 가깝게 잘했지. 그런 작품은 어… 주몽 같은 이런 역할이 만일 남자 주연이었으면 그건 진짜 활달해야 해. 동작도 크고.. 활을 잡아도..온-몸의 힘을 다해서 화살을 잡아서..탁..놓는 것도 기냥 놓는 게 아니야..온 손 끝에 힘이 가가지고 탁…놓고..아주..이런 기개가 필요한 것이 주몽 같은 역할이라면…… 그러나 그것도 너무 세게 하면 남자주연 맛이 안 나지. «국극 프로젝트»에서 주목할 것은 예술적 주체로서 정은영이 대상과 유지하고 있는 거리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시점은 초기영화가 연극을 영상화할 때 취했던 연극적 ‘타블로(tableau)’와 롱숏을 고집하고 있다. 포커스를 맞추거나 주요 인물이 등장할 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주밍(zooming)이 이루어질 뿐이다. 의미 부여가 필요 없는 미미한 움직임이므로, 배우들이 위반하고 있는 규범의 폭을 생각한다면 이 거리감은 초연을 지나쳐 냉담에 가까운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해러웨이가 말하는바, 수동성을 부수고 움직이는 렌즈의 눈처럼 복잡성과 복수성을 달성함으로써 부분적인 관점화를 이루는 ‘열정적 초연’의 포기를 말하는가. 이에 대한 나의 답은 [no Ω]이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이 거리를 통해 정은영은 주체를 중심으로 한 대상의 객체화로 구축되는 전통적 재현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창작과정의 문제점들, 말하자면 작가들은 대상을 자기화하는 과정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피할 수 있을까? 재현된 대상이 그 대상 일반을 대표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예술가에게는 운명적인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모순, 갈등이자 결코 메워지지 않을 불연속성, 거대한 틈새를 의식하게 한다. 때로는 열정을 가지고 때로는 초연한 거리두기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해도 이 간극은 영원히 입을 벌리고 있을 터이다. 나는 여기에서 소통의 불가능성을 제기했던 차가운 손을 가진 어떤 여자를 떠올린다. 열정과 초연 사이에 위치하거나 하지 못하는 서늘한 타자의 출현, 나는 이를 시적인 아우라가 두드러졌던 정은영 초기작의 생산적인 균열이며, 창작의 전 단계에 시종(始終)하는 작가적 정체성 탐구의 일환으로 «국극 프로젝트»에 가시화된 것이라고 본다. 3 시적인 것들, “내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언술하고 싶다” 우리의 받침대가 사랑일 때 고통으로 달구어진 신을 신을 때 나는 나를, 밤은 밤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이 장에서 다루는 정은영의 작품은 미술의 바깥을 향한 어떤 고백처럼 보인다. 그 바깥에는 문자언어가 있고 서사가 있고 또 시가 있다. 문학에서 고백은 표현해야 할 것(내면)과 표현된 것(형식)의 이분법으로 존재한다. 이 둘을 혼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문학적 고백을 이해하는 핵심이다(가리타니 고진, 1997: 103). 미술의 내면과 미술 바깥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 미술 바깥에 다수 포진해 있고 미술 안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것, 그리고 정은영이 방법론으로서 작품에 현저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서사이다. 정은영은 서사를 도입하고 비디오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작가의 내면적 욕구와 미술가로서 전문교육을 받기 시작할 무렵의 화단 분위기에서 찾는다. 당시는 모노크롬 추상이나 개념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그 자체로 철학적이고 근엄한 이미지로 존재감을 발한다. 단, 서사가 기능할 여지가 거의 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정은영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미용실 여인의 죽음과 같은 작은 개인의 작은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추상으로 이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돌파구로서 비디오 매체를 발견했고 이로써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작업이 구체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백의 내용과 형식이 합의점을 찾은 셈이다. 정은영이 서사를 보여주는 방식은 시적이다. 시는 이미지로 흘러가는 공간을 포획하고 그 안에 언어의 시간성을 흘려보낸다. 언어의 내부에는 서사가 없다. 언어는 음소의 반향과 신택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서사는 언어 바깥에 머문다. 사건을 인간적 시간으로 배열하고 질서를 부여한 것이 바로 서사이다. 정은영의 화면은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지향하는 것은 이야기가 발원한 지점, 시적 파토스(pathos)의 확산이다. 파토스는 시적 소통의 알파이며 오메가이다. 시인은 내면에 정념의 파동이 일 때 펜을 든다. 독자는 언어로서 구체화된 것을 읽고 자신의 파토스 안에 이를 수용한다. 도처에 시가 있지만 모든 발화가 시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실험이 소통의 파토스를 적정 수준에서 얻지 못할 때 성공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정은영의 <천식>(2006)은 기계의 몸을 통한 파토스를 보여준다. 화면은 회전하는 세탁기와 멈춤, 색색인 빨래의 뒤엉킴을 반복적으로 재생한다. 여기에 시적 리듬과 파토스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기침이다. 기침하는 자는 작가일 터인데 관객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관객의 눈에 기침하는 몸은 세탁기이다. 작가는 기침하는 몸으로 파토스를 발신하고 관객은 인간의 발성기관을 지닌 기계의 파토스를 수신한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이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김수영, 1981: 97)라고 썼을 때 이는 일종의 쾌감을 동반하는 배설 행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은영의 기침에는 신체에 안착하지 못한 존재의 불편함이 두드러진다. 안쓰러움의 감정이 일어난다. <엄마가 죽으면>(2005)에서 그녀는 오열하는 몸을 보여주기도 했다. 생물학적이고 사적인 이 몸은 이제, 타자와 교류하고 연대하는 소통의 지점이 될 것이다. <그 여자의 두통약>(2006)은 라오스에서 촬영한 화면과 엄마에게 전해 들은 미장원집 여자의 이야기를 매치시킨다. ‘거짓-매치(faux-raccord)’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 어긋난 시공간적 만남이 서술 화자와 이름 없는 여인의 일시적인 연대를 가능케 한다. 그 매개를 이끄는 객관적 상관물이 두통약이다. 남편에게 맞고 돈을 뜯기며 살아왔던 그녀는 두통약 상용자였다. 손바닥 위에 놓인 두통약을 보면서 ‘나는’ 중얼거린다. 나도 그 여자처럼 두통약을 먹고 잠든 어느 밤 고요히 숨을 거두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 그 여자는 죽어서야 비로소 미장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여자의 영혼이 여행하고 있을 만한 곳들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거처를 알릴 수 없는 곳, 쓸모를 찾지 못해 버려진 어느 한 귀퉁이처럼,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 영토, 그러나 누군가 분명히 숨 쉬고 있을 어느 타자들의 공간. 라오스의 낮 시간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뭉개져 있다. 이미지는 흐릿하고 불분명해서 이 세상이 아닌 장소 같다. 여기에 정은영은 자신의 손을 포갠다. 누추하고 슬픈 영혼들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듯이. 정은영의 손이 유발하는 것은 ‘함께 있음’(être-avec)의 감각이다. 나도 다르지 않노라고, 우리 모두가 목소리의 권위를 얻지 못한 호모 사케르일 뿐이라고, 그녀는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간밤의 여행자>(2007)는 미장원집 여자처럼 이름 없이 죽은 조선족 여인의 여정을 좇는다. 이 여행은 사후적이다. 그녀의 육신은 이곳을 떠났다. 따라서 그녀는 재현되지 않는다. 그저 없는 존재로 있을 뿐이다. 없는 여인의 혼이 카메라에 빙의된 것처럼 화면은 흔들린다. 불안하다. 화자와 여인이 함께 보았던 세탁소 남자는 여전히 노동에 열중해 있다. 정은영은 말한다.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은 밤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고. 가장자리에 모여드는 존재들이 있다. 호모 사케르, 아브젝트, 하위주체들. 이들과 우리는 시의 육체를 빌려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연대를 이룬다. 그 중심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이 슬픔의 파토스이다. 4 연대,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라가지 않았다”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흩어지면… 흩어지면, 함께 하는 죽음이 열릴까?[6] 있어라 하시자 빛이 나타났다. 양자 역학은 이렇게 묻는다. 그 빛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머뭇거리는 틈새가 벌어진다. 한 여자가 말한다. 그것은 파동이다. 이 빛은 입자로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지금 ‘회절’의 작은 틈새를 말하고 있다. <좁은 슬픔>(2007~2008)은 기지촌이 있는 동두천 보산동의 캠프 케이시와 상패동 캠프 님블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다. 다음은 정은영의 관찰기이다. 원주민을 밀어내고 거대하게 담장을 친,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남한의 이 작은 ‘군사 도시’의 시가지를 배회하며 마주치는 얼굴들은, 주로 이주민이라고 호명되는 다양한 인종들이다. 거리를 활보하는 이국의 여자들은 아기를 눕힌 유모차를 밀고 나와 삼삼오오 한낮의 수다를 즐기는 중이고, 골목골목마다 이국의 언어가 자연스레 들려온다. 미군들의 나잇 라이프와 여흥을 돕는 클럽의 수만큼, 이국에서 온 여자들의 수가 넘쳐나고, 이국 음식점과 식재료를 파는 상점들 또한 넘쳐난다. 오래전, 클럽에서 일하던 여자들의 시체를 흘려보내던 신천은 이제 그 주변을 시민공원으로 단장하고 미군과 클럽여성의 낭만적 데이트를 위한 장소를 제공한다. 반짝이는 수면과 녹음이 어우러진 여름의 냇가는 여자들의 시체를 흘려보내야만 했던 역사를 더 이상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자본과 힘의 재배치에 따라 기지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과거 소설이나 르포기사로 전달되던 기지촌 고유의 이국적인 삶은 홍대 앞이나 강남 등으로 유입되었다. 한인 여성의 역할은 ‘마마상’으로 바뀌었고 그 빈자리를 채운 건 필리핀 여성이다. 가톨릭을 믿는 여성들은 피임을 주저하고,아이들은 계속 태어나지만 문서에 등록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유모차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그을린 얼굴로 골목을 뛰어 놀게 되겠지. 영업시간을 피해 평일 낮, 이들의 커뮤니티를 위해 마석에서 오신 신부님이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집전한다. 정은영은 다양한 차이와 문화와 입장이 교차하는 난맥상의 ‘소리’에 주목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는 동두천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도전하는 의지, 저항, 생존의 형태로서의 ‘소리’이다. 이 작품을 위해서 나는 주로 길 위에서 클럽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노래하는, 노는, 호객하는, 유혹하는, 예배하는 소리들을 녹음했다. 한국어, 영어, 타갈로그어들이 혼합된 이 소리는 허밍, 노래, 그리고 무엇보다 애도의 소리이다. 나는 앞에서 회절에 대해 말했다. 회절은 해러웨이가 확산을 통한 반사, 전통적 반영을 넓어서는 의미론적 범주로 고안한 광학적 은유이다. 장애물이 있을 때 빛은 틈새를 통과하고 휘어져 들어가 확산해 나간다. 그 결과 ‘동일한 것의 반사가 아닌 간섭 패턴’, ‘광선의 역사’가 후면의 스크린에 그려지게 된다. 정은영이 주목한 인식론적 회절의 틈은 “누구의 삶이 삶이며, 어떤 삶이 애도할 만큼 중요한 삶인가?”라는 버틀러의 질문이다.[7] 이 목소리는 특권화된 중심을 거부하고 ‘세계 속에 차이를 낳고자 하는 노력’의 확산을 예고한다(해러웨이, 2007: 64). 차이의 생산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의 작용에 의지해야 가능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소리의 특성이 부각된다. 문자의 구문론은 의미라는 구심력을 내장한 채 차이의 입장들에 침묵을 부여한다. 반면 소리는 원심력적인 확산을 통해 조화/부조화를 지향하거나 드러낸다. 소리는 제각기 섞이고 흩어짐으로써 중심이 비어있음을 보여준다. 웅얼거림, 노랫소리, 성당 음악의 뒤엉킴은 지금껏 도달한 적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캄캄하다. 영도의 빛이 머무는 이곳은 그저 있음으로 소임을 다하는 존재론의 세계이다.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에 메워지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존재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데 인식의 빛은 필수적이다. 예술가 또한 인생을 의미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세계에 의지해야 한다. 하지만 인식론의 거대한 그물망에 몸을 기대자마자 우리는 성긴 그물코 사이로 수많은 실존들이 빠져나가고 환영만 남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찾는 것이 예술가들에게는 필생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이를 위한 고투로서 정은영이 보여주었던 인식론적 공간이자 틈이다. 비디오의 기본 이미지는 클럽 건물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문이다. 심지어 열려진 작은 문은 그 뒤에 있는 클럽 여성들의 초라한 거주공간으로 이끈다. 이 문의 폭은 너무나 좁아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현실이 상상을 초과할 때가 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좁은 틈에도 삶이 살아가고 존재들은 이동하거나 그곳에 머문다.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했다면, 이 틈새공간은 잉여로 취급되어 철거 대상이 되거나 환경미화를 통한 장식적 기능을 부여받을 것이다. 그러면 거주자들은? 유령으로 떠돌게 되겠지. 정은영의 존재론을 향한 인식론적 물음이 발견한 것이 바로 이 틈새이다. 그리고 이 좁은 틈을 통과한 그녀는 슬픔이라는 존재론의 영역으로 몸을 옮긴다. 나는 <좁은 슬픔>의 다면화된 분할 프레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작가는 이 방법이 내러티브를 폐기하는 과정에 얻게 된 것으로,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레임 분할과 내러티브 폐기의 동기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점에서 그 함의를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정은영의 내러티브는 단성적인 측면이 강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흐친은 소설의 특성을 교향악적·다성적인 목소리에서 찾았다. 그렇다고 모든 소설이 다성적인 특징을 가진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가 톨스토이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톨스토이 작품에는 “작가의 단일한 의식이나 목소리만 존재할 뿐이며, 작중 인물들은 작가의 의식이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동적인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김욱동, 1988: 165).이는 ‘단일한 이미지나 단일한 상징을 중심으로 한 시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은영의 작품이 시적이라 말할 때, 이는 독백적이고 단성적인 화자의 목소리에 의해 주도되는 구조를 전제한다는 이야기이다. 정은영은 명민한 작가이다. 내러티브 폐기의 이면에는 독백적이고 단성적인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식을 더 집요하게 끌고 간 것이 앞서 살펴본 «국극 프로젝트»이다. 정은영은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예술적 대상을 ‘자신과 나란히 공존하는 독립적인’ 주체로 보여주었다. 그러면 <좁은 슬픔>의 인식론적 질문이 비추는 문을 하나씩 열어 보자. 포스터로 제작된 <좁은 슬픔>은 서울 변두리 골목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미지이다. 작은 술집들이 내부에 위치한 건물, 간판과 문, 벽의 사각 프레임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정은영은 이 화면 안에 다양한 소리들을 흘려보낸다.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은 소리들 틈으로, 움직이는 이미지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동두천의 일상적인 천변풍경, 거리와 건물, 자동차 도로 등을 포착한다. 다음으로 타운의 배후지로 여겨지는 산천의 길, 자연 풍경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에 강한 인상을 부여하는 것은 시신을 염하는 장면이다. 이 이미지들은 간판과 벽 같은 기초적인 프레임을 지우거나 살리면서 퐁퐁 솟아나고 사라진다. 이 모든 풍경들은 한 두 개의 중심으로 환원 불가능한 우리 삶의 다원성을 존재 그 자체로서 전시한다.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고 빛의 영점지대에 들어선다. 이어 상중하의 삼면으로 분할된 화면이 나타난다. 일상의 이미지 뒤편으로 회절의 빛이 확산해 가는 것이다. 이는 상패동의 무연고 무덤으로 가는 길을 촬영한 것이다. 먼저 하단의 화면이 열리고 작은 냇가와 키 작은 풀들이 보인다. 여기 흐르는 물은 생명력과 관계하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묘지다. 묘지에서 살아있는 물은 금기다. 시신을 훼손하고 사자(死者)의 안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정은영은 죽은 후에도 망자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본래 물이 흐르는 곳에 묏자리를 쓰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의 전통적 지혜를 무시한 채 물길이 이 작은 동산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이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오히려 어떤 ‘언어’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그들을 위해 묵념한다. 기억(remember)의 제식은 대상을 다시(re) 우리의 구성원(member)으로 들어오게 하는 행위이다. 기억 행위를 통해 죽은 자들은 산자들의 세계에 머물고 생의 행정에 관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호모 사케르는 기억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생명은 너무도 값없어, 죽음에 이르러도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 말 그대로 ‘벌거벗음’의, 황폐화된 기억의 주체인 것이다. 정은영이 이들을 떠올리며 ‘연대감’이라는 말을 발음하는 순간을 나는 경이롭게 지켜보고 있다. 다채롭기 이를 데 없는 인종, 젠더, 권력, 국적, 직업, 정체성의 혼란한 뒤섞임들 속에서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위치 지어짐에도, 이들의 삶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 낮에 들렀던 필리핀 이주여성들을 위한 작은 공동체 미사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타갈로그어의 신성한 음성들이 이 거리의 떠들썩한 소음과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을 상상한다. 성스러운 종교적 언어들이 이곳의 저열하고 취약하며 세속적인 언어들과 리듬의 조각을 하나씩 맞추어 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벌거벗은 삶’의 내부를 채워나가는 동시에,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삶의 장소들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 숨 쉬는 언어들이 지금 이 기이한 여름밤의 공기들처럼 엄연히 우리에게 감지된다. 이방인의 위치에서 느끼는 이 강한 연대감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그것은 슬픔의 감각이다. 버틀러가 말하는 ‘감각의 민주주의’. 버틀러는 9·11 후 애도의 종식 움직임에 대항하여 “슬픔을 극복하지 않고 ‘애도에 머물러 있기’”를 말한다. 정은영은 성스러움과 비루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장면을 상상하고 그 대기 속에 머무른다. “나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웃이, 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해가, 우리에게 어떤 ‘공공의 영역’ 혹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이 도시 안으로 불러들인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공동체의 구축을 꾀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가능성 안에 그저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다. 이 가능성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매우 ‘좁은’ 것이지만 필멸의 존재로서 이 공동체에 소외되는 인간은 있을 수 없다. 고로 이것은 우주적으로 완전한 기획일지도 모른다. 그 주변에 인간적인 것이 남아 있다면 아마도 애도의 노랫소리일 것이다. 5 투쟁,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귀이다” 우리, 라는 대명사. 관형사적으로는 순수하게 1인칭으로 기능한다. 우리 안에 나밖에 없다니, 나는 참 무식하게도 커라. <좁은 슬픔>에서 정은영은 ‘주권 밖에 있는 비체적 개인들의 정체성을 재현’하리라 마음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실상을 노골적으로 파헤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슬픔의 정서로 맞이하고 자신의 망설임과 취약함이 그들의 얼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혹자는 정은영의 작가적 포지션과 정치적 비실용성을 비난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답하여 나는 미공개작 <장마>(2011)를 소개함으로써, 정은영이 향하고 있는 길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고자 한다. ‘어렴풋함’은 자신으로 말미암은 균열을 사유하는 자에게 ‘의미의 구성조건’이다. 그러한 불가피함 안에 우리의 ‘궁핍함’과 ‘의무’가 있다고 말한 낭시를 또 떠올리게 된다(블랑쇼, 낭시, 2005: 109~110). <장마>에는 다시 소설이 등장한다. 이는 큐레이터 이대범의 기획으로, 30분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졌던 ‘소설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였다. 이 서사물이 비디오 작업과 만난 것이 위의 작품이다. 정은영의 서사에서 이 작품이 보여주는 새로움을 몇 가지 언급할 수 있다. 첫째, ‘당신’이라는 2인칭의 탄생이다. ‘미용실 여자’, ‘세탁소 남자’, ‘조선족 여자’가 보여주듯 정은영 서사에서 2인칭은 비활성화된 인칭이자 숫자였다. 십수 일 동안 지겹게 내리는 장맛비를 견디다가 ‘나’는 문득 당신을 떠올린다. <장마>의 화자가 호명한 대상은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씨이다. 그때, 나는 문득 당신의 장마가 궁금해진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을 장마가, 당신의 그 힘겨운 계절이, 당신의 그 고통스러운 밤들과 당신의 그 절박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해에의 의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 참담한 마음, 그러나 당신이 그토록 놓치지 않으려 길고 긴 시간을 붙들어 온 한 줄기 희망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장마>의 두 번째 새로움은 살아서 투쟁 중인 인물을 서사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당신’을 보기 위해 거칠어지는 빗줄기를 뚫고 부산으로 향한다. <장마>는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 내부, 마당의 식물을 적시는 빗줄기, 그리고 한진중공업 근처의 집회 현장의 삼면 영상으로 구성된다. 정은영은 크레인 위에서 이루어진 김진숙 씨의 연설을 녹취한 사운드와 빗소리를 영상 위에 띄운다. 김진숙 씨는 굉장히 뜨거운 언어로 말을 하는 사람이며, 그 주위에 이상한 공명이 생겨나는 독특한 아우라를 지녔다고 작가는 술회한다. 이것은 질긴 생명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그녀의 트위터에 전태일, 박종철처럼 시대의 횃불이 되라는 메시지가 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너나 죽으세요.”[8] 이러한 에너지와 무관하게 소설의 어조는 무겁고 우중충하다. 현실이 그러하므로, 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는 하다. 우리가 점거(occupy)해야 할 장소를 점령한 것은 전경 차들이고 시위 현장은 스펙터클처럼 소비되고 있다. 빗줄기는 굵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과시하듯 변덕을 부리며 끊임없이 내린다. 그런데 비가 잠시 멈추는, 믿기지 않는 순간이 우리에게 도래한다. 이에 ‘나’는 짧은 희망을 품어보지만 삼십여 분의 햇빛이 무색하게 지상은 다시 ‘물의 시간’으로 가득 찬다. ‘나’는 작가 임민욱의 말을 빌린다. “장마의 끝은 예보되지 않을 것”이라고. 정은영은 김진숙 씨 연설의 일부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이 대목을 영상 안에 세팅한다. “얼싸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날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 연설의 원본이다. 여기에서 정은영은 ‘투쟁’ 소리를 지우고 우렁찬 빗소리를 삽입하고 있다. 이 지워진 ‘투쟁’, 곧 ‘투쟁’은 끝이 없는 장마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결국 투쟁을 유발하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이 종식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전망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웃으면서’ 이러한 일상을 ‘함께’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장마>의 새로움을 한 가지 더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서사가 ‘당신’의 서사와 대면하는 장면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이는 당신의 발생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우중충한 서울, 장마 속의 일상을 두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여정, 부산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시간의 서사, 짧은 희망, 좌절의 서사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서사는 미장원집 여자, 조선족 여자의 이야기만큼이나 작고 사소할 터이다. 또한 ‘당신’에게는 결코 전달되지 않을 파동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공유한 현실의 ‘벽’ 사이로 길 하나가 새로이 트였다는 것은 간과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이 사소한 통로가, 틈이 우주의 무의미 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감각이 우리에게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6 종착,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나, 지금, 여기야, 묻지.마.아무것도.그냥. 모래의 심장을 껴안는 숨결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귀’를 내려놓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앞 장의 제목에서 인용했던 ‘마귀’를 바르트는 “내 언어를 재앙으로 몰고 가 내 스스로를 해치려는 어떤 뚜렷한 힘”이라고 설명한다. 마귀는 자해 충동의 은유이다. 예술가가 예술에 내재한 취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 마귀일까, 최대한 감추는 것이 마귀일까?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개별적인 선택지가 있을 뿐이겠지. 단, 무언가를 감추지 않고 고백할 때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 열리게 됨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재현의 실패를 통해 예술가는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느니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재현 가능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창조성의 신이 되느니 사이보그가 되는 길을 우리는 이미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임을 인정할 때 사이보그의 길은 더 가까워진다. 모두가 잠든 이 시각, 치르륵치르륵 내 등 뒤의 태엽을 누군가가 감아주고 있다. 그 손은 나의 것도 신의 것도 아니다. 내가 정신적·물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관계의 에너지가 만들어낸 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의존성이 또 실패가 우리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정신은 비관적이어도 의지는 낙관적일 것. 감옥에 유폐된 채 세상을 향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람시를 생각해 본다. 바람이 분다. 이제 글을 내려놓으며, 열정과 초연함의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작가 정은영을 불러본다. 홀연히 나타난 그녀는 우리가 의지해도 좋을 굵은 점 하나를 찍고 사라진다. “예술은 움직임에 관한 것이지 고정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 화룡점정! 가리타니 고진(1997),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역, 서울: 민음사 김수영(1981), 「눈」, 『김수영 전집 1』, 서울: 민음사 김욱동(1988), 『대화적 상상력』, 서울: 문학과지성사 로시, 브라이도티(2004), 『유목적 주체』, 박미선 역, 서울: 여이연 블랑쇼, 낭시(2005),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박준상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다나, 해러웨이(2007), 『겸손한 목격자』, 민경숙 역, 서울: 갈무리 |
1 Flow, to “all who arrive safe”[1] The words ‘arrive safe’ One’s tongue seems to Cling to in the mouth The red whispers You may break and smash We met in our 20s. A poet likened life before 30 to a raw egg.[2] But at the time, Eun Young Jung (siren eun young jung) was unlike such an egg. She was reticent but her voice was determined, and her eyes radiated a will not to succumb to confusion. When I was in my early 30s, Jung left for England. I used to hear of her life there as a womad (woman nomad). In 2002 when she came back to me in Seoul, I was slightly amazed. Her work with Eun-su Kang appeared as a form of solidarity in the 2nd Women’s Art Festival. As I considered coldness and warmth an indicator distinguishing death from life, I didn’t know how to accept her coldness, speaking to me, even crying.[3] Her work is the story of an alien with cold hands. The narrative involves “I said you’d like to share with me a journey to a place for you stay. Getting my breath, I waited for her. Even if she rejects, there is nothing I can do I thought. In any case, we have to go on separate paths. And at the end of this extremely tough journey, and somewhere in the future, we will meet again. At this moment however, I offer my hand to her. The woman offers her blue hand, and I gladly hold her hand, which naturally felt warm.” Can the narrator of this story be identified with Jung? What information do we have about her? Her hard shell thwarting infiltration is only a surface. She is a complex, multi-layered self. Jung is usually timid, but if necessary, turns active and enthusiastic. In a narrative she reluctantly yet persistently gazes at the blue hand of a woman she met in an unfamiliar city. “It is obvious everyone speaks different languages. ------ I cannot communicate with you too.” Despite the cold tone of voice of the woman with the cold hands she overcame the chill of silence. Her ardency derives from an indifference affirming the inevitability of rejection. This attitude may be generalized as chic, but Donna Haraway might refer to this as ‘passionate detachment’, and here is some solidarity between passion and detachment. 2 Passing, “What to reply this time is the skin” An actor who says life is theater, and his expression A life passes quickly As on a revolving stage in a play within a play Dust rises. An old woman is covered in makeup in The Mas querading Moments (2009). Above a space where there are furrows and eyelids, a mascara brush deletes her sex and age. She looks neither man nor woman, neither young nor old. What are those with colorful youth called? We may call them ‘cyborgs,’ or ‘old women’. —They disturb gender and old cyborg women. Upon hearing of Geum-aeng Cho’s death, I recall Eun Young Jung. Before the portrait of the deceased she lowered her head slightly, awkwardly. Her back looked sad. May peace be with the deceased! The following is from her obituary. “Geum-aeng Cho, superstar of Yoesung Gukgeuk (traditional women’s Korean theater) died at the age of 82. ------- Women gukgeuk, with a heyday in the 1950s, is traditional theater composed with narrative songs, traditional dances, and witty narrations. All performers are women. The deceased often dressed like a man and executed a charismatic performance. She was one of the most popular entertainers of the time. She had an imaginary wedding with a female fan who adored her.”[4] The imaginary wedding Cho had is a vivid projection of her life. Jung created The Wedding (Digital Print, 2011) by exploiting this episode and a photograph. No sign of a woman is found in the groom of this work. The groom appears as a young man with fine, gentle features. This character, whose biological sex is erased, appears in reality beyond a stage. In Jung’s work Cho looks back on the wedding of a gukgeuk member in which she dressed up like a man. This talented actress ‘ceaselessly recomposes the stage,’ disturbing reality. Haraway whispers “An actor or practitioner is a cyborg.”[5] An artistic representation of cyborgs appears as hybrid artificial objects of body and machine and specific monster images. However, what should not be overlooked here is a cyborg refers to our identity without any specific mechanical equipment and body distortion. Moreover, the cyborg is the subject intentionally blurring the distinction of categories such as woman and man, nature and culture. In this respect, actress who act men in gukgeuk who disturb the category of gender by repeating actions normatively requested for men are forerunners of cyborg subjects (Braidotti, 2004). Jung captures original cyborgs advocating that gender authority is a false image, pointing out its subversion and historicity. She also shows the gukgeuk performers are different beings, paying attention to their individual voice. Cho was a performer who specialized in playing the role of ‘Nimai’ (male protagonist who is brave, good, and romantic). Cho completely forgot she was pregnant while immersed in playing a man: when acting as a man, her physical identity becomes close to that of a man. This shows her repetitive practice might remove her original physical traits. The One-Eyed (Digital Print, 2011) comprises episodes and photographs of So-ja Lee, special performer of ‘gadaki’, (a villain interrupting male and female protagonists’ love). Wearing a black eye patch, she appeared charismatic, in this secret episode that was very interesting. According to Jung, she was Princess Salalah in reality, and never gave up her identity as a woman. In those days when she took this photograph, Lee had double eyelid surgery. She wore the eye patch to hide the surgery. As a result, she came to have an intense ‘gadaki’ image. Lee is a cyborg grasping the fulfillment of life and the meaning of her work as an actress. Her fulfillment and present attainment as cyborg are encapsulated in video. The Rehearsal (2009) shows a process of staging. On the stage, language is of significance as ‘a process of movement’ seeking execution. The Master Class (2010) is a play with a monolog by cyborg Hye-ri Kim with a builtin memory chip of Directing for Gender (2010). As Kim has a weak presence, she operates her brain instead of her body, and recovers an interesting history by operating her body again. How was fighting with swords among women? “Women were good at sword fighting — close to an acrobatic movement. When playing Jumong, if an actor performs this, he has to be lively and agile. He should shoot arrows with his full strength. Playing Jumong demands such grit. It is so strong, but the action is improper as a male protagonist.” Notable in the Gukgeuk Project is the distance Jung maintains as artistic subject. In this work the camera remains fixed, presenting a ‘theatrical tableau’. When capturing a new character, delicate zooming is used, so the distance she maintains appears as coldness beyond aloofness. As Haraway argued, does this mean relinquishing ‘passionate detachment’, attaining complexity and plurality by shattering passivity? My answer is “No.” This is not abandonment. Through this distance Jung questions the conventional view of representation formed through the objectification of objects. How can artists avoid problems in creation like violence involved in internalizing objects? Can represented objects represent general objects? These questions remind artists of contradictions, conflicts, unbridgeable gaps, and discontinuity between ontology and epistemology. Even though I escape from these elements at times with verve or distancing, the gaps remain open. I recall a woman with cold hands who raised the impossibility of communication. The emergence of the cool other between passion and detachment ------ I consider this a productive crack and exploration of artistic identity in her early works with a conspicuous poetic aura. I see this is visualized in the Gukgeuk Project. 3 The poetic, “I’d like to narrate in another language, not my language” When propped by love When wearing shoes heated by pain I begin confessing Night begins confessing. Jung’s work in this chapter confesses beyond art. Outside art are character languages, narratives, and poems. Confessions in literature are dichotomous: confessions to be expressed, and confessions expressed. Distinguishing the two is the key to understanding such literary confessions (Kojin, 1997). What is inside or outside art? Many narratives are outside art, but are rare inside. They are what Jung clarifies in her work as a methodology. Jung was motivated to adopt narratives in her video work by her desire and the atmosphere of the Korean art scene when she began professional education as an artist. At the time monochrome abstraction and conceptual art were mainstream, with a strong presence and their own philosophical, and solemn images, but they scarcely allowed intervention from narratives. Jung however had something to covey: trivial individual stories like a beautyshop owner’s death. As she could not contain stories in abstraction, she discovered video as a breakthrough, concretizing her work on narratives. The content and form of confession found a common ground in this work. Jung presents narratives as poetic. A poem captures space flowing as imagery, instead of demonstrating linguistic temporality. There is no narrative within language. Language constitutes its world with phonemic reflection and syntax. Narratives are found outside language. A narrative arranges events in humanistic time, lending order. What moving images seek is the spring of narratives and expansion of poetic pathos. Pathos is the alpha and omega of poetic communication. A poet writes a poem when the waves of pathos arise in his inner world. A reader embraces the waves concretized in language into the pathos. Poems are ubiquitous, but narrations are not all embraced as poems. Regrettably, conceptual, abstract experiments remain unsuccessful when failing to attain the pathos of communication. In Asthma (2006) Jung shows pathos through a machine body. Video images show repetitive reproductions of a revolving washing machine, a pause, and entangled laundry. Coughs lend poetic rhythm and pathos to the work. One who coughs is perhaps the artist, but she is invisible. The body coughing is the washing machine. Poetic communication is made as the artist exudes pathos through her coughs, and viewers accept pathos from the machine with human vocal organs. It is asymmetric communication: nobody seems to suffer loss. When poet Su-young Kim wrote “Young poets! Let’s cough,” (Kim, 1981) coughing felt like an act of excretion accompanying pleasure. In Jung’s cough however, there is inconvenience provoking pity. In If Mom Died (2005), she presents a wailing body. This biological, private body becomes a post where she has exchange and solidarity with others. In Her Pill (2006) Jung matches scenes she photographed in Laos with a story of a beauty salon owner that her mother conveyed in a type of faux-raccord (false match). But this discrepant encounter in space-time enables a temporary solidarity between the narrator and unnamed woman. An objective correlative leading intermediation is the headache medicine. The woman, physically and economically harassed by her husband, is a habitual user of headache pills. Seeing the medicine on her palm, I murmur. “Will I draw my last breath one night when I fall asleep after taking headache pills like the woman? The woman could not come out from the beauty salon until she died. I often envisage places where her soul travels: territory nobody has concern for like a dark place or a corner of useless land, which is space where the other breathes.” Daytime in Laos remains crushed. As images blur and obscure, it seems like another world. Jung overlaps her hands as if to soothe humble souls, bringing a sense of ‘etre avec’ (being with). She seems to whisper we all the same; are nothing but Homo Sacer (the sacred man in Latin; a man who is banned, may be killed by anybody, but may not be sacrificed in a religious ritual) whose voice has no authority. In The Last Night Traveller (2007) Jung follows a journey of an ethnic Korean woman residing in China. This journey is posthumous because her body has already left. She thus cannot be represented, and just appears as non-being. The scene shakes as if the camera is possessed by her soul. The laundryman the speaker and the woman witness is engrossed in his labor. Jung says ghosts appear on the verge of night. There are beings gathering on the edge: Homo Sacer, objects, and sub-subjects. We form a temporary, flexible solidarity, borrowing the body of a poem. Staying on its margin in pathos. 4 Solidarity, “No priests followed” Mother, a sick port lies in this boat. They are in a bridal dress. —If scattered, will death we share open?[6] Light emerges. Quantum mechanics asks if light is wave or particle. A reluctant chasm opens. A woman says light is the wave. The light leaves its mark where particles cannot arrive. The Narrow Sorrow (2007-2008) is a video work based on Camp Casey in Bosan-dong and Camp Nimble in Sangpae-dong, Dongducheon. The following is Jung’s observation: “Faces in the downtown of this small South Korea military city in the center of the US Army bases encircled by enormous walls are of diverse race, mainly called immigrants: women from foreign countries striding the street, chatting in groups with baby carriages. Foreign languages from back alleys sound natural. As there are so many clubs for American soldiers, streets are overflowing with alien women and restaurants and shops selling foreign food. The Sincheon where the bodies of club girls flew down long ago, has been renovated into a civic park by a stream, offering a dating place for American soldiers and club women. The glittering surface of water and a well-shaded stream sides with trees in summer, and is no longer a reminder of a painful history.” The military towns underwent many changes due to rearrangements of capital and power. Exotic aspects in such towns previously conveyed through novels and reportages flew into Hongik University and Gangnam, and the inflow goes on. The role of Korean women has turned to pimps, and their places were replaced with Philippine girls. The Catholic Filipina hesitate at contraception, and babies are born often, but they are disqualified from official registration. Babies on baby carriages grow and play in back alleys. A priest from Maseok celebrates a mass in Tagalog for their community during daytime avoiding their working hours. Jung draws attention to sound in chaos in the intermingling of diverse gaps, cultures, and positions. “The primary motif of this work is sound as defiance, resistance, and survival of women living in Dongducheon. For this work I recorded sounds of club girls’ chatting, singing, playing, touting, luring, and worshiping on the streets. The sounds: a mixture of Korean, English, and Tagalog is a humming song, and above all a sound of condolence.” I commented on diffraction above: diffraction is an optical metaphor Donna J. Haraway used in a semantic category beyond reflection through expansion and traditional reflection. If there is an obstacle, light is refracted and expanded after passing through a chasm. As a result, ‘patterns of interference, not reflection of the same thing’, and ‘the history of the rays of light’ appear on the back of a screen. The chasm of epistemological diffraction for Jung is the question “Who’s life is life and what life is significant to mourn?”[7] This voice regards the expansion of ‘efforts to bring about differences in the world,’ refusing a privileged center (Haraway, 2007). The production of such difference is possible through more dependence on centrifugal over centripetal force. With this the traits of sound is emphasized. While syntax lends silence to differences, with the centripetal force of meaning, sound seeks or reveals centrifugal expansion, harmony, or disharmony. Sound shows the center is empty through mingling and scattering. An intermingling of murmuring, songs, and cathedral music usher us to a world we have never been to. The world where guiding light stays is an ontological world that completes its mission just as it exists. There is an unbridgeable gap between epistemology and ontology. Existence is not all about enriching the meaning of existence and making life livable. We have to return to the epistemological world. The following denotes the epistemological gaps Jung presents. “The video’s basic image is a small door between club buildings. The narrow open door leads to club women’s shabby residential space. As this door is too narrow to imagine people can pass through it.” Reality at times transcends imagination. People live stuck in a narrow chasm. Without seeing this reality, this space will be removed or decorated in name of beautifying the environment. If so, residents will hover as phantoms. What Jung’s epistemological question toward ontology discovers is this chasm. She moves to the sphere of ontology after passing through this narrow chasm. I don’t’ want to put meaning to a divided façade. Jung says this way is obtained through a process of discarding narratives and not intended initially. However, its connotation may be emphasized in that the facade division and narrative disposal is on both sides of the same coin. Jung’s narratives were previously monophonic, but her work has started undergoing new changes. Mikhail Bakhtin discovered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a novel in its symphonic, polyphonic voice. Even so, he did not mean all novels have a polyphonic voice. A typical example is found in Tolstoy. For Bakhtin, “Tolstoy’s novels have only his single consciousness and voice, and the characters in the novels are nothing but a passive medium to convey his consciousness and voice.” (Wookdong Kim, 1988) It is also the nature of poetry highlighting a sole image and sole symbol. When Jung’s work is defined as poetic, the assertion presupposes a structure spearheaded by a narrator’s monologic, monophonic voice. Jung is a smart artist. The abolition of narratives stemmed from her critical consciousness of monologic, monophonic representations. She pursued this consciousness in the Gukgeuk Project above mentioned. Fixing the camera, she shows artistic objects as ‘independent subjects equally coexisting with herself ’. In Narrow Sorrow, Jung demonstrates images commonly found in back alleys on the edge of Seoul. The frame of this work consists of a building in which small bars are located, signboards, doors, a wall’s square frames. She draws diverse sounds into this video work. Moving images including stream side scenes streets, buildings, and motorways emerge among cluttered, disorderly sounds, and then mountain paths and nature’s scenery appear. The scene of cleaning and shrouding the deceased lends a strong impression to all these images. The images appear and disappear, erasing or reviving basic frames of signboards and walls. All these scenes demonstrate our lives’ plurality irreducible into one or two centers. As the scene becomes darker, entering the zero point of light, it’s divided into three parts and an upper, middle, and bottom emerges. Diffracted light expands to the back of daily images. This tripartite scene show videotaped images of the path to the cemetery of those without surviving family in Sangpae-dong. As its bottom opens first, a small stream and grass are visible. Is the water flowing here related to life force? That is probably so, but here is a cemetery. Water is a taboo in a cemetery because it may damage the dead body and disturb a peaceful rest of the deceased. Jung expresses her condolences to the deceased who are treated like this even after their death. “Water flows through this small hill, disregarding the traditional wisdom of feng shui saying a gravesite should not be set in a place where water flows. The bubbling of the stream sounds like a ‘language’. Giving careful attention to the sound of water flowing, I pay a silent tribute to the deceased.” A ritual of remembering is an act of making objects become our members again (re-).The dead stays in the world of the living and is involved in the administration of life through an act of remembering. From this respect, Homo Sacer are those who are not remembered. As their lives are so worthless, nobody remembers them after their death. They are the subjects of ruined memories. I keep an eye on the moment Jung pronounces the word ‘solidarity’ while recollecting them. “Although they are thoroughly regarded as strangers in a chaotic mixture of various races, gender, power, nationalities, occupations, and identities, I feel a strong solidarity with their lives. I envisage some sacred voices in Tagalo in a community mass for Philippine migrant women. I imagine sacred religious language puts together the pieces of vulgar, profane language and rhythm here. The breathing languages filling the interior of this ‘naked life’ and the place of living before our eyes are sensed like air on this weird summer night.” What do we call this strong solidarity at the position of strangers? That is a sense of sorrow. Butler said about ‘staying in condolence, not overcoming sorrow’ in confrontation with the movement to terminate condolence after the September 11 attacks. Jung recalls the scene where the scared is in harmony with the vulgar. While alluding that “We consider the possibility of some ‘public sphere’ or ‘community’ in the city with our understanding of ourselves, those we love, our neighbors, and those we have never met will disappear.” But she does not intend to establish any community. She simply chooses to stay within possibility. As this possibility presupposes death, it is very narrow, but no humans as perishable beings are alienated from the community. This is perhaps perfect cosmic planning. If something humane remains about this, it is a song of condolence. 5 Struggle, “We are devils to ourselves” The pronoun ‘we’ Purely works as a first-person pronoun. Only ‘I’ is in us I am so ignorantly big. In The Narrow Sorrow Jung makes up her mind to ‘represent the identity of individuals who stay out of sovereignty’, but does not expose their reality explicitly. She greets them with the emotion of sorrow, only showing that her reluctance and vulnerability depends on their faces. Some may criticize Jung’s artistic position and political impracticality. Echoing this criticism, I’d like to present the direction Jung takes through her undisclosed work The Seas on of Occupation (2011). ‘Vagueness’ is the ‘institutional condition of meaning’ for those contemplating cracks caused by themselves. I recall Nancy saying that our ‘destitution’ and ‘obligation’ is inevitable (Blanchot & Nancy, 2005). Jung introduces a short story to this work. The novel she refers to as a 30-second novel constitutes the base of this video work. A new tendency this work shows in her narratives is the emergence of a second-person pronoun, ‘you’. As the ‘beauty salon woman,’ ‘laundry man,’ and ‘ethnic Korean woman residing in China’ indicate, the second person is an inactivated number in her narratives. Enduring the monsoon rains for a dozen of days, ‘I’ recollect you all of a sudden. One who is called in the work is Jin-sook Kim, ex-Hanjin Heavy Industries worker who has been protesting on a high crane. “At the time, I suddenly come to wonder, how you spend the rainy season. I also wonder about your tedious rainy season, tough season, painful nights, and desperate, precarious choices. My will to understand you moves my mind: my will to understand the hope you have kept for many years.” The second new trend is the fact this work is a projection of one who is alive and struggling. ‘I’ leave for Busan to meet Jin-sook Kim in heavy rain. The Seas on of Occupation consists of tripartite video scenes, such as the interior of a car running in the rain, rains getting plans in the yard wet, and the scene of the strike at Hanjin Heavy Industries on a high crane. Kim’s recorded speech and the sound of rain flows through the video scenes. The artist recollects that Kim speaks in very hot language and has a unique aura generating a weird resonance about her. This can be interpreted as tenacious life force. When receiving the message you should be a beacon of the times like Tae-il Jeon and Jong-cheol Park on Twitter, she replied “Just you do yourself.”[8] Irrespective of such energy, the novel’s tone appears heavy and gloomy. Riot police vehicles occupy the place we have to occupy, and the scenes of demonstrations become spectacles. Rains keep up frivolously as if to boast of the diversity of its thickness. In an unbelievable moment the rains stop for a while. With this, I have a brief hope, but the ground is again filled with the ‘time of water’ despite sunlight for 30 minutes. I murmur, borrowing what artist Minwook Lim said, “A weather forecast will not tell us the end of the rainy season.” Jung sets this in video after erasing some part of Kim’s speech. It is said the original speech is “I am sure the day we embrace will come. At the day to come, struggle!” Jung inserts the resounding sound of rain after deleting “Struggle!”. This means the deleted part “Struggle!” should continue like rains in the rainy season because contradictions and conflicts in reality will not die out. It also signifies a gloomy look at the daily life we have to endure. I discovered one more new tendency the work shows. That is the scene where my narrative faces with your narrative. This is as significant as the discovery of ‘you’. What unfolds before us is a journey to meet her, leaving daily life during the rainy season in Seoul behind, a narrative of time where the artist looks you and listens to your voice in Busan, a brief hope, and frustrated narratives. Those narratives are as trivial as the stories of the beauty salon owner and the ethnic Korean woman living in China. The passageway newly engendered between the walls of reality you and I share should not be overlooked since even if this insignificant passageway and chasm disappear into the meaninglessness of the universe, the fact that we share them is important for us. 6 Terminal S tation: “Thus the night brightened the night.” I’m here. Now. Ask me. Nothing. Just because. Like the breath embracing the heart of sand. It’s not an easy task for one to put down ‘the demon inside’. The ‘demon’ cited in the title of previous chapter is, according to Roland Barthes, a “certain definite power that leads my language to calamity and to self-harm.” Demon is a metaphor of the impulse for self-harm. Would it be demonic for an artist to reveal or conceal the weaknesses in his own art? There can never be a correct answer but only countless distractors case by case. However, we know empirically that when we confess something without concealing it, a road never taken opens up. Artist becomes more human through failure in representation. Donna Haraway remarked that she would rather be a cyborg than a goddess. Actually, we might already be on our way to becoming a cyborg than a god of creativity whose ultimate weapon is its ability for representation. Humans become closer to cyborgs when they admit their essentially dependent existence. Late at night when everyone is asleep, someone is winding up the spring on my back. This hand doing the winding does not belong to me nor a god, but to whatever that is between the self and others, whom the self relies on psychologically and physically. Such dependency — which is our yet another failure — will make us continue to live. While the mind is pessimistic, the will should be optimistic. I’m reminded of Gramsci, who continued his writing towards the world while sitting in a prison, confined. The wind blows. I conclude this text, calling forth siren eun young jung, an artist who roams through the alleyways of passion and passionlessness. Making a sudden appearance in this world, Jung vanishes after leaving behind a boldness that beckons us: “Art is about motion, not stillness.” What a nice finishing touch, indeed! Kojin, Karitani. (1997). The Origin of Modern Japanese Literature (You-ha Park, Trans.). Mineumsa. Kim, Su-young. (1981). The Eye. Mineumsa. Kim, Wook-dong. (1988). Conversational Imagination. Moonji Publishing. Braidotti, Rosi. (2004). Nomadic Subject (Mi-sun Park, Trans.). Seoul: Yeoyiyeon. Blanchot & Nancy. (2005). The Unavowable Community (La Communaute Inabouable) (Lee Jun-sang, Trans.). Moonji Publishing. Haraway, J. Donna. (2007). Modest Witness (Kyung-sook Min, Trans.). Galmu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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