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c) 2015
All Rights Reserved by the Artist
siren eun young jung

 


‘페미니즘 SF’를 부르다
정은영展 2. 28 광주 빛고을아트스페이스

정은영의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는 판소리라는 올드미디어를 푸리에의 정념 가득한 사회주의적 이상 세계와 결합하는 공연이었다. 판소리 중에서도 <춘향전>을 소재로 1)완정한 형태의 정전화된 판소리 2)현재의 바닥 정서를 반영하는 원초적인 ‘춘향굿’ 3)학술 차원의 강연 4)국극이라는 구성 형태의 재현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여러 표현 형태를 경쟁적이고 우발적이며 신체화된 내러티브로 반죽한 공연으로 이뤄진 앗상블라주라고 할까. 그런 유동적 형식이 빛나는, 판소리라는 신체화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의도가 완전히 성공하는 듯한 형국이라고 할까.

‘인류학자로서의 작가’라는 신기원

이 공연에서 흥미로운 진실은 여러 갈래가 통합되는 복합적인 구성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면에서 반향이 되는 잘 들리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판소리학의 박사가 옥중에 갇힌 춘향의 쑥대머리를 학술적으로 분석하면서 <춘향전>은 춘향이라는 주체가 주어진 체제의 전복을 향한 목소리를 담은 텍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소리꾼 지정남 씨가 열린 공간으로서 마당의 에너지를 모아모아서 지금 광주의 정치적 정서를 흡입한 ‘춘향굿’으로 표현하는 것이나, 그런 에너지를 머금고 현재의 정전화된 판소리와 북소리를 감상하는 것 등이 지향하는 세계. 결국 푸리에라는 사회주의자가 미완의 혁명으로서 제시하는, 스피노자식의 기쁨이 넘치는 감응 세계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어스름하게 반향이 되는 감응적 잠재 영역이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를 여성국극과 더욱 래디컬하게 만나도록 주선하는 것이다.

즉, 이 공연은 여성국극을 이 자본주의적 세계에 만연한 남성중심적이며 자유주의적인 휴머니즘의 영역에서 이탈한 대안적인 세계로 보도록 종용하는 또 다른 작품이다. 왜? 여성국극의 배우가 앞서 중첩되는 춘향의 여러 내러티브의 자원을 배경으로 하나의 페미니즘 SF의 차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얘, 춘향아!” “네, 서방님”이라는 두 연인의 문답이 하나의 몸, 신체화된 실재를 통해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슐러 르귄이 «어둠의 왼손»에서 일찍이 제시했던 소위 ‘케머(kemmer)’ 상태의 출현처럼 느껴지며, 정은영 작가가 얼마만큼 젠더의 감각적인 것과 정치학을 결합시키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케머’란 성적 역할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1

여성국극의 판소리 기반은 맑은 소리(천구성)와 탁한 소리(수리성) 사이의 선택인데, “얘, 춘향아!” “네, 서방님”의 두 소리가 하나의 신체화된 타입으로 표현되는 것이 소위 ‘케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소리의 변환이 주는 매력이 근대의 여성국극 열광을 설명해 주며, 이 가변적인 ‘케머’ 상태를 좀 더 정치적인 것의 차원에서 사유하도록 종용하고 있기도 하다. 즉 불안정한 사회적 위상에도 화려한 영예를 누리고 있던 여성국극이 마르크스도 하나의 이념형으로 예찬을 금치 못한 푸리에의 실현되지 못한 혹은 전미래적인 완성을 위한 미완의 혁명처럼 다가오기 시작한 비전으로 여겨진다.

사회와 문화에 개입하는 인류학자로서의 작가가 중립적인 상대주의의 입장을 관철할 수 없기 때문에 존립 불가능하다는 할 포스터의 판단과 달리 정은영은 오래된 과거의 역사를 인정받은 지식과 상상력, 구성주의 그리고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을 통해서 인류학자로서의 작가라는 신기원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이 포스트포디즘의 유연 생산 체제에서 소상공업자의 장인적 지위로 전락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작가의 위상을 신체적 실재의 리듬과 잘 들리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를 환기하는 정치적인 것의 기획으로 우뚝 세우고 있다고 할까.

/ 김남수

정은영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2014_아시아예술극장이 개관준비 사업으로 추진한 공연. 판소리 <춘향가>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으로, 재담꾼, 학자, 국극배우, 소리꾼, 고수 등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어슬르 르 귄 «어둠의 왼손» p. 275

월간 아트인 컬쳐 2014년 4월호